잡지에서 읽은 시

호병탁_아픔과 그리움, 동정과 연민의...(발췌)/ 붓꽃 편지 : 윤옥란

검지 정숙자 2021. 6. 13. 18:45

 

    붓꽃 편지

 

    윤옥란

 

 

  긴 소매를 걷어 올린 붓꽃

  한 획을 긋는다

  물빛 허공은 이내 검푸른 편지지가 된다

 

  한 점 흐트러지지 않는

  그의 손끝이 찌르르 내 혈관을 타고 흘러들어온다

 

  아주 오래 전 피는 꽃잎 속에 그의 이름을 묻었다

  북으로 가는 새떼들 부리 속에도 묻었고

  검은 구덩이 속에 묻히는 이름과도 함께 묻었다

 

  수십 년이 지났다

  기억에서 지워진 그 사람의 이름이

  내 안에서 새들의 날갯짓처럼 푸득 날아올랐다

 

  그 이름 앞에서

  눈앞이 까무룩해진다

 

  붓꽃 속의 사내는

  내 심장을

  거듭거듭 뜨겁게 하여 그리움 풀어내고 있다

 

  검정색 잉크가 다 마를 때까지

  속마음 들키지 않는

  초서체의 문장을 쓰고 있다

     -전문-

 

  아픔과 그리움, 동정과 연민의 순도 높은 서정(발췌) _호병탁/ 시인, 문학평론가

  작품 서두의 "긴 소매를 걷어" 올리고 "한 점 흐트러지지" 않고 "한 획을 긋는다"는 서술은 바로 붓꽃의 반듯하게 뻗어 올라간 잎의 형상에서 포착된 심상이다. 그 '곧은 잎'은 허공의 '푸른 편지지'에 "감청색 잉크가 다 마를 때까지" "초서체의 문장"으로 편지를 쓰고 있다. 물론 '감청紺靑색'은 붓꽃 자체의 짙은 남빛색깔을 가리킨다. 하늘은 '편지지'가 되고, 붓꽃의 감청색은 '잉크'가 되고, 곧은 잎은 "그의 손끝" '붓'이 되어 '초서체'의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니 작품에 동원된 어휘들은 모두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서로 의미를 나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 더 있다. 이 작품의 주제는 무엇보다도 심장을 뜨겁게 하는 '사랑'이다. 글에 나타나는 애절한 아픔도 안타까운 그리움도 다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랑의 주제는 또한 붓꽃의 꽃말과도 연결된다. 아이리스를 열렬히 사랑했던 한 화가는 그녀의 고운 자태를 그렸다. 그녀는 그림에 감동했지만 향기가 없음을 아쉬워했다. 그때 어디선가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그림에 살포시 내려앉더니 입맞춤을 했다. 순간 감격한 아이리스도 화가에게 키스를 했다. 지금도 아이리스 즉 붓꽃은 그들이 처음 나누었던 키스의 향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향기를 풍긴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리스는 '달콤한 키스의 향기'라는 꽃말로 전해지게 되었고 통상적으로 '소식, 사랑'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 아름다운 얘기는 그대로 작품의 주제와 맞물려 연결되고 있다. (p. 시 202-203/ 론 21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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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네르바』 2021-여름(82)호 <신진 조명/ 신작시/ 감상평>에서

  * 윤옥란/ 2018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날개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 호병탁/ 시인, 문학평론가, 시집『칠산주막』, 평론집『나비의 궤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