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박진희_의미와 교호하는 형식의...(발췌)/ 다소 고전적으로 : 김은령

검지 정숙자 2021. 5. 26. 21:41

 

    다소 고전적으로

 

    김은령

 

 

  시총은

  시총詩塚*이란 이름같이 그렇고 그런 사연의 무덤인데

  그 발치에 충노 억수도 납작 엎드려 있다

 

  수백 년이 흘러 백골이 진토 되었을 억수,

  그 억수 무덤에 홀리듯이, 홀리면서

  타래난초 피었다

  휘감기는 자태가 여우도 홀린다 하고, 꽃말은 인연의 끄나풀이라 하는데

  암튼 알음알음 그 색에 혹한 사람들 끼리끼리 찾아와

 

  음, 음, 음, 음

 

  거리며, 거리며 희롱하고 간다, 갔다

 

  비 내리는 윤유월 그날

  혼자 슬쩍 찾아가 수작 걸다 알았다

  함초롬히, 자못 의연하기도 한 저 꽃이 감아쥐고 있는

  색, 의 실상은 타래타래 펼쳐서 정인情人을 품은

  별당 아씨 자홍빛 치마폭이라는 것을,

 

  감히 나 따위가 희롱한 상대는 아니었다

     -전문-

 

  의미와 교호하는 형식의 아름다움(발췌) _박진희/ 문학평론가

  '타래난초'라는 꽃을 중심으로 시상이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타래난초'의 근원이랄까 탄생이 주목을 요한다. '충노 억수'의 "무덤에 홀리듯이, 홀리면서" 피어난 것이 '타래난초'이기 때문이다. '억수'는 임진왜란 때 전사한 선비 정의번의 노비이며 죽어서도 정의번의 '시총' 발치에 "납작 엎드려 있"는 '충노'다. 선비 정의번이 아닌, 노비 '억수'의, 그것도 "수백 년이 흘러 백골이 진토 되었을 억수"의 무덤에 홀리어 피어났다는 것이 이채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타래난초'는 여우도 홀릴만한 자태와 사람들을 혹하게 하는 색을 지니게 된다.

   (······

  선비와 노비, 희롱의 상대와 별당 아씨 등 이 시에는 유교적 위계질서가 존재한다. 그것은 '시총의 발치'에 납작 엎드려 있는 '억수'에서 보듯 "수백 년이 흘러 백골이 진토되었"어도 여전히 구동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견고한 위계질서가 '타래난초'를 중심으로 전복된다는 사실이다. '타래난초'가 선비 '정의번'이 아닌 노비 '억수'에 홀려 탄생한 것이 그러하고 사람들 무리가 줄지어 희롱하고 간 '타래난초'의 실상이 '별당 아씨'였다는 사실이 그러하다. 약각의 비약을 감수한다면 시인은, 인간 존재가 획득한 권력이라든다 정치 · 사회 · 경제적 지위란 현세에서 잠시 걸쳐 입은 옷,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다소 고전적으로", 그러나 매우 감각적으로 전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p. 시 162-163/ 론 163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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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에』 2021-여름(62)호 <시에 시인/ 시 깊이 들여다 보기>에서

   * 박진희/ 대구 출생, 2009년『시와정신』으로 등단, 수필집『낯선 그리움』, 저서『유치환 문학과 아나키즘』『문학과 존재의 지평』『서정적 리얼리즘의 시학』『박재삼 문학 연구』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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