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밭에서
전인
고구마 캐내고 나서
텅 빈 밭 바라보니
갈 것은 제각기 갈 데로 가고
돌아갈 것은 모두 돌아가
고구마밭 텅 빈 게 아니구나
돌아가 곳곳에 가득 차 있구나
되돌아보면,
이제까지 하늘땅 사이 산목숨들
고구마 넝쿨 이랑 넘듯
우리 모두 이 한 세월 넘어왔구나
정육점 갈고리에 걸려
그 서슬 시퍼런 자본과 맞서
뚜욱,
뚜욱,
생피 흘리는 고깃덩이처럼
진땀 흘리며 넘고 있구나
지금도
-전문-
▶ 타자 지향의 윤리학(발췌) _ 오민석/시인, 문학평론가
자아는 타자의 요구에 부응할 때 윤리적 주체로 전화轉化한다. 자아가 자신의 자리에 남아 타자에게로 넘어가지 않을 때 윤리적 존재는 탄생하지 않는다. 윤리적 주체는 자아가 자신의 리비도를 타자에게 전이시켜 자신을 스스로 텅 비게 만들 때 생겨난다. 타자의 결핍을 채워주기 위해 "제각기 갈 데로 가고/ 돌아갈 것은 모두 돌아가" 고구마밭이 스스로 "텅 빈 밭"이 될 때, 타자 지향의 윤리학이 완성된다. 그렇게 자신을 비우고 대신에 타자가 "곳곳에 가득 차" 있는 것이야말로 윤리적 주체의 삶이다. "목숨"들은 이렇게 타자가 되거나 타자에게로 넘어갈 때 비로소 "산목숨"이 된다. 윤리적 주체들에게는 공통의 적이 있다. 그것은 소유와 전유를 가장 큰 미덕으로 아는 "시퍼런 자본"의 문법이다. 윤리적 주체들은 자신을 찢어("정육점 갈고리에 걸려" "생피 흘리는 고깃덩이") 타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주면서 공통의 적에게 맞선다. 이것이야말로 '신성한 테러'로서의 윤리적 삶이다. (p. 시 78/ 론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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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 2021-봄(75)호 <오늘의 시인_신작시/작품론>에서
* 전인/ 충남 논산 출생, 1981년『삶의문학』동인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지친 자의 길은 멀다』, 농촌 중학생들의 삶과 노동의 글 모음『생각 캐는 날』엮음
* 오민석/ 1990년 『한길문학』신인상에 시 당선, 1993년《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굿모닝 에브리원』등,평론집『몸- 주체와 상처받음의 윤리』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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