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늙은 밭 외 2편/ 신달자

검지 정숙자 2021. 3. 31. 02:12

 

 <2020, 제6회 한국서정시문학상 특집 / 수상작> 中

 

    늙은 밭 외 2편

 

    신달자

 

 

  늙은 밭에도 잡풀은 자란다

  절반은 자갈이 들어박혀 수명 다해 가는 거친 밭에도

  돌 사이를 비집고 잡풀이 자란다

 

  이렇게 천둥이 치고 치는 밤

  늙은 여자의 밭에도 이름 없는 바다의 해일이 쳐들어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잡풀이 온몸을 덮어

  회초리로 쳐도 죽지 않는 잡풀이 살 속을 흔들어

  다만 누워 고요라도 암벽 타듯 끌어안으라 한다

 

  어쩌다가 눈에 익은 배롱나무 한 그루

  무슨 인연으로 천둥 낙뢰를 혼자 맞으며

  방에서 새어 나간 마음 한줄기

  밤새 누가 울었는지 소나기 없었던 마당이 젖어 있다

 

  다만 누워 어둠을 꼬아 사슬처럼 온몸에 두르니

  누군가 이리 떼처럼 운다 바스라지듯 운다

  얼마나 단단한 심장인가 하늘이 내려와 땅을 덮고 땅이 솟구쳐 하늘을 껴안는

 

  늙은 밭에는 홀로 울음을 달래는

  산 그림자가 산다.

    -전문-

 

 

    ------

    

 

                   네, 저는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네" 

  이천 년 전

  이 짧은 대답 하나로

  거친 광야를 다 안아 들인 여자

  어린 나이에 두렵고 떨리는 그 생을 받아안았으므로

  그 예리한 칼로 찔르는 예언에의 순명에 자신을 바쳤다

  성모마리아

  네, 네 대답 하나 던지고

  머뭇거리지 않고 덥석 받아안은 못

 

  나는 나의 종이어서

  네

  내가 내게 대답하고

  달아나면서 달아나면서 어쩔 수 없이 받은 못

 

  네 그 짧은 대답 하나로

  성령으로 처녀 몸에 아이를 가지고

  그 아이 섬기며

 

  그 아이 피땀을 입술로 닦은 여자

  가슴에 받은 그 못이

  그 아이의 살을 뚫고 들어가는

  인류 구원은 못으로 시작하였으니

  인류 구원은 피로써 이루어졌으니

  인류 구원은 그 아이의 죽음으로 이루어졌으니

 

  내 그 짧은 대답 하나가

  인류와 한 세상을 구원하였으나

  네 네 네

  오늘 나는 이 짧은 대답을 내일로 미루고  있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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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들판을 건너온 바람이

 

 

  눈 덮인 겨울 들판을 건너온 바람이

  내 집 노크를 했다

 

  내가 문 열지도 않았는데 문은 저절로 열렸고

  바람은 아주 여유 있게 익숙하게 거실로 들어왔다

 

  어떻게 내 집에 왔냐고 물었더니

  여기 겨울 들판 아닌가요? 겨울 들판만 나는 바람이라고 한다

  이왕 오셨으니

  따뜻한 차 한 잔 바람 앞에 놓았더니

 

  겨울 들판은 겨울 들판만 마신다고 한다

 

  말이 잘 통했다

 

  처음인데 내 백 년의 삶을 샅샅이 잘 알고

  겨울 들판을 몰고 와 겨울을 더 길게 늘이고 있다

 

  차가운 것은 불행이 아니라고

  봄을 부르는 힘이라고 적어 놓고 있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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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사』 2020-겨울(104)호 <제6회 한국서정시문학상/ 특집>에서

   * 신달자/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1964년 『여상』에 「환상의 밤」 당선, 1972년 『현대문학』 추천-등단, 시집 『봉헌문자』 『모순의 방』 등, 산문집 『백치 애인』 등, 시선집 『이제야 너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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