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박남희_브레인스토밍과 새로운 시적 상상력(발췌)/ 낡은 옷 : 박해람

검지 정숙자 2020. 10. 26. 00:50

 

 

    낡은 옷

 

    박해람

 

 

  낡은 옷은 구멍이 뚫려서

  그 사이로 별이 보이고 착한 거짓말과

  머뭇거린 주장은 올이 풀려있다

  풀린 올은 혹독했던 모함 쪽으로 슬금슬금

  옷 하나를 옮기고 있다.

  세제가 다 빠진 맑은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빨랫줄이 보인다.

  남루한 폐허를 한 벌 옷에 불러들이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닌지라

  어느 성자는 남방南方의 후덥지근한 

  맨몸의 상체를 빌려 입었고

  신약新約은 소매와 기장이 없는 

  모래바람을 즐겨 입었다는데

  저이는 몸보다 옷이 먼저 경지에 다달았다.

  군대군데 구멍을 뚫고

  또 이곳저곳을 찢고 나간 몸이

  고단했을 것이라는 추측이지만

  저 구멍들은ㄴ 빠져나간 흔적들인가

  아니면, 불러들인 흔적들인가

  지퍼와 단추들이 죄다 사라졌으므로

  그냥, 겉치레 행색만 남은

  낡은 옷엔 다행스럽게도

  풀벌레와 여름이 가득하다

     -전문-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과 새로운 시적 상상력(발췌)_박남이/ 시인 

  낡은 옷은 보이는 그대로 그 옷이 헤쳐 온 지난한 세월을 내장하고 있다. 더군다나 구멍이 뚫릴 정도로 낡은 옷은 그 사이로 바람이 드나들기도 하고 별이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구멍 속으로 별이 보인다는 것은 낡은 옷이 자연과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과 가까워진 옷은 빨았을 때도 "세제가 다 빠진 맑은 물방울"이 매달리는 것이 아침이슬처럼 자연스럽다. 그러나 시인의 표현에 의하면 "남루한 폐허를 한 벌 옷에 불러들이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시인은 이러한 고행을 남방의 성자와 신약시대 광야의 모래바람 속을 살던 사람들에 비유하면서 "저이는 몸보다 옷이 먼저 경지에 다다랐다"고 말한다. 시인은 낡은 옷의 구멍을 '빠져나간 흔적들'인지 아니면 '불러들인 흔적들'인지를 질문하고 있다. 아마도 낡은 옷의 구멍들은 고통이나 가난이 빠져나간 흔적들이거나 풀벌레나 여름을 불러들인 흔적일 것이다. 이 시를 메타시로 읽어서, 낡은 옷을 가난한 시인의 제유로 본다면 풀벌레와 여름은 그동안 시인이 시를 쓰면서 얻은 결과물일 것이다. 낡은 옷이라는 대상에서 "세제가 다 빠진 맑은 물방울이거나 맨몸으로 살아가는 남방의 성자와 신약시대의 누추한 옷을 떠올리는 것들에서 우리는 브레인스토밍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p. 시 274-275/ 론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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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와표현 2020-가을호 <좋은 시 리뷰> 에서

 * 박남희/ 1996년 ⟪경인일보⟫ &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폐차장 근처 『고장난 아침』 등, 평론집 『존재와 거울의 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