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공항, 남자.
조원효
흰 눈을 맞으며 알몸이 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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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은 표정을 번역하고, 싱크대가 눈동자 흘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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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 트랙 너머로부터. <파괴. 호소력> 커브를 돌며 나는 개를 몰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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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조도 거리 비추고. 인공 불빛 깜빡이고. 택시는 펜스 옆에서 실종되고. 정원을 산책한 자들은 정원에서 이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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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알몸이 정류장에 앉은 남자 위로하며. 체온은 희박해져요. 울고 있어? 너? 창 밖에 흰 눈이 내려요. 흰 눈이 내려요. 라디오 켰다가 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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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파수 고가 도로 불빛에 닿고. 버스의 텅 빈 허기로부터. 유리창에 비친 흰 알몸의 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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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그곳은 가본 적 없지만, 노르웨이, 내가 보고 있는 것과, 과거의 기억까지. 커피숍 손님들 괴롭히듯이. 상가 계단에 착란 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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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노르웨이. 고통은 원근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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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알몸에 대해 나는 써요. 빛나는 눈이라고 쓰고. 바퀴벌레라 쓰고. 느려진 폭력이라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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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박차고. 모서리가 완성돼요. 타원형 탁자 밑에서. 평소보다 왼발이 부풀어 오른 것 같아. 두 마리 고양이가 우는 독특한 방법을 알아냈어. 신나서 자랑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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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노르웨이. 파편은 사유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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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 지붕에 수사학이 있다고. 나는 내가 시에서 죽인 화자들과 부모가. 붉은 카펫 밟으며. 무도회장 홀에서. 춤추는 것을 보았는데. 박자는 엉망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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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너쇼에 함께 하지 않을래? 정원 속에서 걸어 나와, 현관문 바깥으로 도망쳐요. 절벽 끝까지. 이빨과 심장이 흔들릴 때까지. 깊이와 욕조. 벽면과 소통. 굴뚝 연기를 굳게 만드는 현실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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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아트 : 마릴린 먼로는 노르웨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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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흰 알몸은 말해요. 노르웨이란 뭘까. 늙은 남자가 우쭐해하면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 싸구려 호텔 라이터 목구멍에 넣고. 폭발해주세요, 애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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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눈이 내려요. 흰 눈이 내려요. 흰 눈을 맞으며. 헤드라이트 불빛 흐려지고. 조수석의 나는 앤디 워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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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열등 환한 빛 속에 갇혀. 비상구 계단 모퉁이 끝에서. 없는 아내. 없는 아이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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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역 근처 서점에 들어가. 반 회전하는 액자 찢고. 박제된 동물 눈물 뜯고. 타원형 테이블에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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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환풍구. 창밖의 새. 정원의 비둘기를 씻기고 싶다고. 나는 시각의 변화가 혁명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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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상태의 감정을 말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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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에 작은 주전자. 곰브로비치. 끓는 물. 오븐. 연안. 고향. 중단. 선박. 레몬. 향. 키스.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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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목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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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을 깨트려야 한다고. 당신에게 말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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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물결은 사각형 활자에 담겨 있고. 손의 크기를 측정하는. 방의 둘레가. 밤과 밀접한 소식을. 조수석 옆에 잔해를. 길거리 끝에서. 주유소 바깥에서. 자동차 클락션 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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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과 단순은 가깝고. 전조등 끄고. 침대에 누워. 베개 솜에서. 죽은 새를 꺼냈고. 죽은 새를 꺼내며. 죽은 새를 묻으려고. 탁자 밑으로 숨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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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의 모서리를 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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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정원에서 푸른 꽃이 크고. 펜스 옆에서 행인들은 내가 죽은 줄 알았다며, 사이렌 소리 의심하는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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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두 명 캐치볼하고. 정원 가시에 찔리기도 하고. 얼굴에 낙서를 칠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문구를 끄적이다 말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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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화는 욕망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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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의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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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주의에 빠지는 순간 나는 끝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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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앞바다를 지나 동네 선술집으로. 가끔은. 단춧구멍. 가끔은. 선생에 관해서. 하이볼 한 잔 마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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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에 별 모양 그렸고. 습기. 흐릿한. 당신의 울음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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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자리 콧수염 남자가 일본 후지산에 관해. 화산 폭발에 대해. 일본 가요가 흘러나와 투정 부렸으니. 가지 요리 하나. 우동 하나. 사이다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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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꽃다발 당신의 무릎에 놓고. 늦어서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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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는 말해질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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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나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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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교실서 맞춤법 틀리던 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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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농구장서 중얼거리던 네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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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 헬기와 하늘을 가로지르는 동그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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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 나열은 당신의 비웃음만 살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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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 세 바퀴 뛰며. 트랙 너머로부터. 개가 커브를 물었으니까. 하얀색. 하얀색이라는 관념을 말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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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형을 이렇게 생각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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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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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꽃다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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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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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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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볼 한 잔 마실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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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호는 사랑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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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서 펜스는 끔찍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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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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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여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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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호는 사랑이 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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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쯤 고개 숙인 당신 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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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처럼 말해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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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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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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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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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고개 들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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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 위에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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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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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고개 돌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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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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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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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를 모르는 평행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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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술 냄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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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하양. 없는 몇 미터. 없는 환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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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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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끝이라고.
-전문-
시작노트/ <인천, 공항, 남자>는 4달 전 하늘나라로 떠난 엄마를 생각하며 썼다. 그녀가 살려달라고 절규하는 순간 전화는 툭 끊겼고, 나는 구급차를 불렀으나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몇 달 내내 악몽은 반복됐다. 잠에서 깨면 기절할 것처럼 울었다. 나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나를 외면하고 싶었다.
베른하르트는 「옛 거장들」에서 "당신이 사랑하는 문학은 결코 당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한다. 불행한 일상의 균열에 당신이 무너질 때도, 니체, 하이데거, 베토벤, 당신이 삶의 스승이라 여겼던 작자들은, 삶의 긴박한 순간에, 아무런 도움이 되자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나는 베른하르트를 읽으며 맡줄을 친다. 그가 나의 삶에 효력이 있는 것처럼. 엄마가 죽는 순간에 아무것도 못했으면서.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는 말도 못했으면서. 계속. 나는 나의 삶에 효력이 있을 것처럼. 문학이란 것을 한다. (p. 시 84-99/ 론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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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0-9월호 <신작특집/ 신작시> 에서
* 조원효/ 2017년 『현대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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