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와 윤리
이령/ 시인
인간은 누구나 피투성被投性으로 태어나지만 결국 기투企投하는 존재이다. 어떤 사람도 선택적 출생을 부여받진 못했다. 힘차게 울며 엄마의 자궁 문을 열고 나와 보니 우리는 슬프게도 구속, 제약, 계약이라는 제도적 규율이 난무하는 세상에 던져진 단독자單獨者들이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누구나 피투성被投性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인간은 현재를 넘어서 미래를 향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던지는 실존 방식, 즉 기투企投함으로써 주어진 관습과 허위의식을 버리고 이성적인 인간으로 성장한다. 이것은 단순히 규범과 관습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나은 가치로 발전시킬 때 인간은 더욱 인간다워지고 비로소 집단체로서의 사회는 그 존재적 의미가 생겨난다는 말이다.
주목할 점은 주어진 계급제도에 속박된 삶을 살아야만 했던 고대사회와 달리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지는 태어난 여건에 의해 평생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기득권이었던 부류도 상황에 따라 소수자가 될 수 있으며, 또한 어떤 기회의 장을 부여받아 기득권이 되는 소수자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소수자와 관련된 윤리적 인식의 구축이 소수자들만을 위한 어떤 특별한 배려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의 권익 보호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개개인인 우리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인식이 더욱 요구되는 사회에 살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의무인 동시에 권리이다.
이주 노동자, 혼혈인, 동성애자, 여성, 아동처럼 힘없는 부류의 인간군, 힘이 없어 근원적으로 자신들의 권익을 챙기기 힘든 이들이 소수자이다. 육체적, 문화적 특질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고 불평등한 차별대우를 받아서 집단적 차별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세상의 주류가 아닌 비주류인 그들을 아우르는 사회구성원들의 애정 어린 시선과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도 구축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삶은, 사회는 그야말로 피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소수자에 대한 제도적 지원에 앞서 그들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들을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하며 존중의 마음이 우선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든 그것은 개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삶의 행로가 정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떤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그 자유라는 것이, 실은 인간사 불온의 시작이기도 하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선택이라는 희망카드를 옵션으로 부여받았다. 그런데 선택하는 순간 그때부터 어떤 가치가 생겨난다. 문제는 어떤 것을 선택함으로써 그 선택의 영향이 개인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다른 모든 이들의 가치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즉 자유의지를 가진 나의 선택이 타인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나의 선택에 있어 사회적 책임을 고려해야 된다는 말이다. 너·나 할 것 없이 태어나는 순간 자유를 선고받는다. 다만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현대사회에서는 학문과 예술조차 시장화되고 무한경쟁에 내몰린 탓에 참여자들의 사회적 챰여 의식이 점점 희박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학문과 예술도 결국 자기해방을 도모함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목적을 향해 나가기 위한 자기구속과 행태의 표출이거니와 그 활동에서 기인한 일련의 결과들이 정치 행동이나 사회참여에 한정되는 것이 아닌 시대와 상황에 속박되어 있음과 동시에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사회구성원 각자의 책임을 강조하는 윤리성의 회복에 대한 촉구라 할 수 있겠다.
학자나 예술가 등이 정치나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그 계획에 참여 간섭하는 일을 일컫는 앙가주망(Engagement), 즉 인간이 현재를 넘어서 미래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던지는 실존의 방식으로써 기투企投의 한 축인 문학 작품은 오래전부터 인류의 정신적 지표로서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사회적 파급효과 또한 크다.
무엇보다 소수자와 그들의 삶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고 그 아픔을 대신 울어주는 일이야말로 문학의 진정한 가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그 공감 능력이라는 게 그저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소수자의 경험과 상황을 직접 체험하지 않았다면 단순한 동정과 연민에 그칠 가능성이 많다. 여기서 몇몇 시인들의 삶의 내력과 작품을 통해서 사회적 공감과 윤리적 파급효과를 살펴보고자 한다.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津頭江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 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 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어워
시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는 오랍동생을
죽어서도 못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夜三更 남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김소월, 「접동새」 전문
보편적으로 자유와 비상飛翔의 표상인 새는 이 작품에서 한恨의 표상이다. 의붓어미 시샘에 죽은 누나의 분신인 접동새는 남겨진 동생들 때문에 자유롭게 날아가지 못하고 한을 품고 지상에 남아 있다. 자유와 구속의 모순된 이중성을 갖는 애환의 표상이다.
현실의 비극적 삶을 초월하려는 혈육 간의 애절한 정을 노래하고 있다. “시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는 촉나라의 왕인 명제가 죽어 새가 되었다는 중국 고사와 관련성이 있어 보이며, 또한 이 작품이 발표된 시점을 생각하면 좌절과 한限 속에서 방황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서정적 자아도 얼비친다.
배경 전설이 지닌 휴머니즘적인 정조와 7,5조를 바탕으로 한 민요조의 구성진 율조, ‘아우래비’의 활음조가 빚어내는 애잔한 정서와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접동새의 울음소리를 의성어한 표현 등은 슬픔의 정조를 극대화하고 있다. 의붓어미의 시샘에서 야기된 원한과 혈육들의 애절한 그리움과 함께 현실의 비극적 삶을 초월하려는 의지, 식민지 지식인의 허무의식인 상실과 한의 정서를 표현한 작품이다.
사실 정情과 한限의 교차점이 이별이다. 사람살이에서 평행을 유지하다 사선으로 만나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이별은 예견된다. 그럼에도 사람은 이성과 감성의 경계가 불명확해서 영원히 교차하지 않는 평행으로 가기엔 쉽지 않다. 사선으로 향하는 순간 우리는 ‘인연’이라 여기며 가슴 뜨겁게 서로를 탐하다가 한 점에서 겹치는 순간 한없이 멀어지는 ‘별리’의 아픔과 대면하게 된다. 사별은 인간 의지의 한계 때문에 생이별에 비해 체념이 빠르지만 생이별은 헤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미련 때문에 사별의 애통을 능가하며 정한情限을 남긴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보이는 정한은 자신의 의지대로 생을 살지 못하는 소수자의 아픔을 민족적 정서를 담아 표현한 대표적인 시로 보인다. 하지만 결국 아름다운 이별은 아름다운 후생을 예비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김소월(본명: 김정식)은 일제강점기 당시 민족의 토속적인 한과 정서를 가장 잘 담아낸 시인이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인들에게 폭행당해 정신이상자가 되었고, 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하면서 오산학교에 재학 도중 14세의 어린 나이에 집안의 주선에 의해 결혼을 하게 된다. 오산학교에서 시의 스승인 김억과 사상적 스승인 조만식을 만나게 되고, 그는 문학적 전환점을 맞이한다. 3.1운동의 여파로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일본의 도쿄상과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지만, 시대 상황에 부딪혀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하면서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킬 유일한 기대를 실현하지 못한 상실감과 또한 첫사랑 오순(훗날 의처증인 남편에 의해 요절)을 만나지만 이미 유부남이었던 자신과 짧은 인연으로 끝이 남으로써 이루지 못한 사랑에 탄식하며 그는 불운한 삶을 살다간 비운의 시인이었다. 그러나 불운의 시대를 살다 갔으나 가장 사랑받는 시인으로, 가장 애송되는 시로 후생에 남아 많은 이들의 가슴에 진달래꽃으로 인화되어 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어워
시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의붓어미 시샘에 죽은, 그로 인해 별리의 아픔을 겪고 있는 남동생의 어법을 통해 죽어서나마 고통 없이 자유롭게 비상하기를 바라는 위로를 부려놓고 있다.
또한, 일제 치하에서 수모를 겪는 동족을 향한 눈물겨운 지식인의 속울음이기도 한 것이다.
하늘 높이 슬픈 노래가
저 철교 위를 흐른다.
하늘 높이 슬픈 노래가
저 철교 위를 흐른다.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나는 어디론지 떠나가고만 싶어진다.
나는 정거장으로 내려간다.
내 심장이 입으로 치밀어 올라온다.
나는 정거장으로 내려간다.
심장이 입으로 치밀어 올라온다.
나는 객차를 바라보면서
남쪽으로 날 데려다주었으면 싶어한다.
주여, 푸른 향수란
이건 정말 기막힐 것이올시다.
푸른 향수란 기막힌 것이올시다.
나는 터지려는 울음을 참고
입을 벌려 웃어봅니다.
-랭스턴 휴즈, 「향수鄕愁」 전문
위의 시는 흑인들의 계관시인으로 불리는 미국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인 랭스턴 휴즈(Langston Hughes 1902-1967, 65세)의 작품이다. 혼혈이었던 부모에게서 태어나 할머니의 손에서 양육되었으며 휴즈는 <미국 흑인 회화사 A Pictorial History of the Nogro in America>(1956), <흑인 시집 The Poetry of the Negro>(1949) 등 인종차별에 대한 흑인의 분노와 울분을 표현했다.
그는 당대 새로운 문학예술 형식인 재즈 시의 초기 혁신자로서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시를 많이 썼다. 그가 ‘할렘의 셰익스피어’라 명명되기까지는 태생적 소수자였던 그가 전 생애를 거쳐 보여준 헌신성과 치열한 고뇌가 많은 작품에 투영되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많은 작품을 통해 미국 흑인들의 경험 세계를 뛰어나게 해석했던 작가이다.
“주여, 푸른 향수란 이런 정말 기막힌 것이올시다.
푸른 향수란 정말 기막힌 것이올시다.
나는 터지려는 울음을 참고
입을 벌려 웃어봅니다.”
‘향수’에서 그가 부르짖은 “푸른 향수”는 지난한 자신의 생을 절망하면서도 그 절망을 부감하는 희망, 끝까지 그가 견지했던 어떤 삶의 진실에 대한 울부짖음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시의 결구에서 그는 터지려는 울음을 참고 입을 벌려 웃어보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프랭클린도 그의 저서 『노예에서 자유민으로』에서 휴즈를 저항시인이지만 울거나 고함을 지르는 것이 아니라 웃음을 잃지 않는 작품을 쓴 ‘할렘의 셰익스피어’라 극찬했다.
폴 발레리가 말한 “찰나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삼켜버리는 일. 그것보다 더 창의적이며 진실된 창조력이란 없다”라는 뜻은 바로 문학 작품에 깊이 인화된 문학정신, 즉 그 작품을 통해 독자들이 얻는 공감 능력이며 도저한 문학적 윤리의식이다. 그런 차원에서 바로 휴즈의 ‘향수’가 대표적인 작품이 아닐까 싶다. 휴즈는 태생 혼혈이었으며 농장의 인부, 심부름꾼, 선원, 문지기, 요리사, 급사, 웨이터, 엘리베이터 보이 등 소위 소수자로서 밑바닥 생활을 전전했으나 평생 창작에 몰두하며 인종차별에 항거한 작가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남긴 많은 글들의 작품성도 그러하거니와 태생적 소수자로서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한 생의 의지를 잘 보여준 그의 문학정신일 것이다. 전 생애를 거쳐 그가 끝까지 견지했던 ‘흑인의 흑인다움’이라는 긍지와 아름다움은 아마도 자신이 처한 소수자로서의 결핌과 곤궁과 좌절을 극복하고 오히려 수수자들의 울음을 희망으로 견인했기에 그는 세대를 거쳐 ‘흑인문학의 외교관’이라는 별칭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수레가 풀을 깔고 지나가네
관절 부서지는 굿, 꽃봉오리 터지는 바닥, 두개골 나뒹구는 길, 비명 움켜쥐고 감은 눈동자…, 벌레들이 삼가 초혼가를 부르네.
풀이여
풀잎이여
풀줄기들이여
일어섭시다
풀답게 풀뿌리답게 일어섭시다
다시 일어나 흰 꽃, 붉은 꽃, 노란 꽃을 기웁시다. 다시 일어나 흰 꽃, 붉은 꽃, 노란 꽃을 매답시다. 다시 일어나 흰 꽃, 붉은 꽃, 노란 꽃을 밝힙시다. (자살하지 맙시다) (또)
바큇살… 두려워하지 맙시다
피는… 꽃으로… 스스로에게 갚아줍시다
언젠가는 꼭 횃불을 싣고 강 건널 뗏목이오니
천 번 다친 넋… 만 번 일으킵시다
수레는 수레
풀은 풀 ※ 그것만 기억합시다
지구는 풀의 행성이라네.
이슬과 개미의 행성이라네. 풀의 엔진을 나비는 아네. 풀은 함부로 녹슬지 않네. 게으르거나 튀지도 않네. 최후에 풀이 있었네.
-정숙자, 「풀의 행성」 전문
시인이 표현한 대로 ‘함부로 녹슬지 않는 풀’, 풀은 원래 녹이 스는 물체가 아니다. 물질과 외압과 좌절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왜 시인은 굳이 ‘녹슬지 않는 풀’이라고 했을까? 물질이 정신을 상회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작품에서 풀은 이 땅의 힘없는 존재들의 표상이다. 힘이 없어 자신의 권리에 목소리를 높일 수 없는 소수자들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는 다수의 힘없는 소수자들의 행성이다. 시인은 그 힘없는 이들을 향해 속 깊은 위로를 건네고 있다.
일어섭시다
풀답게 풀뿌리답게 일어섭시다
다시 일어나 흰 꽃, 붉은 꽃, 노란 꽃을 기웁시다. 다시 일어나 흰 꽃, 붉은 꽃, 노란 꽃을 매답시다. 다시 일어나 흰 꽃, 붉은 꽃, 노란 꽃을 밝힙시다. (자살하지 맙시다) (또)
젊은 시절 군인인 남편을 따라 전방을 전전하며(너무 잦은 이사로 인해 늘 낯선 고장, 하여 어느 곳, 어느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던 이방인으로서의 삶의 연속이었다) 인생의 어둠을 읽어야 했던 정숙자 시인은 군인 가족이라는 비탈과 경사가 겹친 이중적 난해구조 안에서 그녀의 결혼생활은 곧바로 철학 입문이거나 수행의 길을 걸어왔노라 술회를 밝히기도 했다.
평생 변방의 시인으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그녀는 ‘시인은 신神의 편지봉투일지도 모른다는 전언을 남겼다.’ 동료들의 시집은 물론이거니와 이름 없는 후배들의 시집도 깊이 읽고 손수 만든 편지지와 편지봉투에 정성스럽게 손편지를 써서 격려하고 본인은 검소하게 생활하면서도 형편이 힘든 이웃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시인이다. 그녀가 자신이 걸어온 삶의 굴곡을 사랑과 사회적 윤리의식으로 승화시켰기에 이런 일련의 선행을 실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큇살… 두려워하지 맙시다
피는… 꽃으로… 스스로에게 갚아줍시다
언젠가는 꼭 횃불을 싣고 강 건널 뗏목이오니
천 번 다친 넋… 만 번 일으킵시다
수레는 수레
풀은 풀 ※ 그것만 기억합시다
바큇살(물질과 외압과 좌절과 시련)에 굴하지 않고 횃불(희망과 옳은 의지와 사랑)을 일으켜 천 번 다친 넋, 만 번 일으키며 “풀은 풀” 그것만 기억하지고 시인은 이 땅의 힘없는 이들을 향해 그들이 아픔을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있다.
지구는 풀의 행성이라네.
이슬과 개미의 행성이라네. 풀의 엔진을 나비는 아네. 풀은 함부로 녹슬지 않네. 게으르거나 튀지도 않네. 최후에 풀이 있었네.
-마지막 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힘없는 소수자들, 잠재적 소수자인 우리들의 터전이며 엔진이 멈추지 않는 한 녹슬지 않으며 게으르거나 튀지 않으며 자신의 운명에 굴하지 않고 나아간다면, 그리고 그 명성에 서로의 횃불을 비춰준다면 “최후에 풀이 있었네”라는 결구의 따뜻한 호명은 더불어 살아가는 밝은 사회의 미래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몇몇 시인들의 견딤으로 우똑한 그들의 생애와 그 속에서 길어낸 대표적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공히 문학작품을 통해 자신의 삶을 투영하며 힘없는 이들을 행해 결 고운 서정으로 위무하고 있다. 시인은 인간, 현상, 사물의 생육멸의 처음과 끝을 보면 난이도는 꽤나 높지만 그 품삯은 형편없는 이성과 감성이라는 감정 가난의 최상위 특권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지난한 시작詩作에서 길어내는 생의 진실을 향한 언어의 조탁과 그 파급의 힘은 어떤 권위보다 높다는 생각을 한다.
그 힘은 바로 타인과의 공감능력일 것이다. 더구나 코로나시국을 겪으면서 우리는 로버트 파커가 말한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심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이제는 물리적 거리두기까지 익숙해져가고 있다. 인간이 예상했던 비대면 사회의 보편화가 좀 더 앞당겨진 판세다. 이럴 때일수록 사회구성원들 간의 공감능력과 정신적 소통은 그 가치와 중요성이 더해지리라는 생각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지 않을까 싶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능력이 바로 공감능력이다. 이것은 연민이나 동정을 상회하는 이타심이자 배려심이며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윤리적 덕목이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시인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울음까지 대신 울어주는 곡비哭婢라고 불리던가?
사회 전반에 도사리고 있는 윤리적 의식의 협소함을 되돌아봐야 한다. 공동체로서 소수자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우리 문화의 한 부분으로 환대하며 그들과 함께 문화를 공유해야 한다. 다름을 다름이 아닌 틀림으로 치부하는 우매함에서 벗어나는 노력은 문학인뿐만 아니라 소수자들과 잠재적 소수자인 사회구성원 모두가 함께 자성의 목소리를 높여야 할 시대를 우리 모두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p. 1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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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인과문학』 2020-가을호 <기획비평>에서
* 이령/ 2013년 『시를사랑하는사람들』로 등단, 시집 『시인하다』 『삼국유사 대서사시-사랑편』, 디지털시집 『밤의 아리아』, 『울진대왕소나무本발화법』 『Beautiful in Gyeongiu-문두루비법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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