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나는 투자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외 1편/ 이승하

검지 정숙자 2020. 8. 24. 17:35

 

 

    나는 투자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외 1편

 

    이승하

 

 

  저 기호에 투자할 가치가 있을까

  이 기호는 나에게 돈을 가져다줄까

  셈하는 동안 주식은 곤두박질치고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때로 이 땅을 떠나고 싶지만

  대박을 향한 꿈이 발목을 잡는다

 

  A는 말한다

  "사람에게 투자하지 말고 사물에 투자하십시오."

  B는 말한다

  "형태에 투자하지 말고 기호에게 투자하십시오."

  C는 말한다

  "이 지상에 투자하지 말고 예수님께 투자하십시오."

 

  세 사람 말이 다 일리가 있지만

  돈이 없으면 투자는 물론이거니와

  배팅할 수 없다 모험을 할 수 없다

    인생 대역전

  기막힌 찬스가 왔을 때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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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행어 연구

 

 

  무인도 아닌 이 사회에서 사는 한

  우리는 모두 정치적 인간

  10의 14제곱 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소우주

  수많은 개수의 기호(유권자)에 둘러싸여

  기호(정당)를 만들며, 기호(정적)를 비난하며

  기호(국민)를 우롱하며 살아간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우리 민족을 둘러싼 기호들

  대공아공영권 내선일체, 황국신민, 창씨개명, 신사참배, 토지조사······

  광복 이후 우리를 둘러싼 기호는

  1945~1949: 38따라지, 마카오 신사, 모리배, 사바사바, 빨갱이, 토지개혁······

  1950~1953년: 인해전술, 각하, 1 · 4후퇴, 민의, 화폐개혁······ 

  1954년 자유부인, 4사5입, 국물······

  1955년: 햅번 스타일, 개판, 사모님, 요새 아다라시가 어딨노······

  1956년: 맘보바지,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 갈아봤자 별수없다

  죽나 사나 결판내자 ↔ 트집 말라 건설하자

  정치가 만든 말들, 유행이 낳은 말들

  정치와 유행은 늘 기호를 만들기에

  선거 떄마다 유행하는 말들이 있게 마련

  기호 없이는 정치도 못한다

 

  슬로건을 만들기 위해

  유행을 만들기 위해

  기호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는

  10의 14제곱 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동물의 왕국

  기호의 왕국에서 우리는

  정치적 의사를 기호로 표시한다

    -전문-

 

 

시인의 말> 한 문장: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있습니다. 제 시의 엄숙성을 제가 한번 깨보고 싶었습니다. 고문정국을 은유적으로 비판한 등단작 「화가 뭉크와 함께」에 불씨가 되었는지 제 시집은 거의 언제나 비극적 세계관의 산물이었습니다. 그간 낸 시집이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폭력과 광기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 『뼈아픈 별을 찾아서』 『예수 · 폭력』 뭐 이런 것이었습니다. 시선집을 2009년에 냈는데 제목이 『공포와 전율의 나날』이었습니다. 서정시, 특히 연애시는 제 본령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제 와서 따뜻한 서정시와 그 하위범주라고 할 수 있는 달콤한 연애시를 써 독자의 사랑을 받는다? 그것도 저와는 거리가 먼 세계였습니다./ 제가 그간 잘 다루지 않았던 세계가 유머 · 위트 · 세타이어 같은 것이 아니었나 반성했습니다. 우리 문학의 튼튼한 전통인 해학과 골계미를 등한히 했기에 이번에 집중적으로 탐색해 보고자 했습니다. 제 박사논문이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풍자성 연구」였습니다. 송욱 · 전영경 · 신동문 · 김지하의 풍자시를 연구했었는데 연구만 했지 본받지는 않았습니다.(p. 50)

 

  제가 요 다음에 시집을 낸다면 『기호의 왕국에서』나 『기호의 천국에서』라는 제목으로 내고 싶습니다. 평소에 재담을 하지 않는, 아니, 할 줄 모르는 제가 이런 시를 모아 시집을 내면 독자들은 고소를 머금거나 냉소를 띨 것 같습니다.(p.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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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와소금』 2020-가을호 <시인 조명 ①/ 신작시> 에서

  * 이승하/ 1960년 경북 의성 출생,  1984년《중앙일보》로 등단, 시집 『사랑의 탐구』 『생애를 낭송하다』등, 문학평론집 『생명 옹호와 영원 회귀의 시학』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등, 기타 저술 위인전기 『김대건』,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 산문집 『그렇게 그들은 만났다』 『한밤에 쓴 위문편지』등,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등, 청소년전기 『청춘의 별을 헤다』, 편저 『한국현대 대표시선』 『변영로 수필선집』등, 공저 『현대사회와 문학적 상상력』 『새로 쓴 시론』등, 우대식 시인과 공편저(요절시인전집) 김민부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진이정 『나는 계집 호리는 주문을 연마하며 보냈다』등, 기타 서적 시 해설서 『백 년 후에 읽고 싶은 백 편의 시』, 시창작 『이승하 교수의 시 쓰기 교실』 『시 어떻게 쓸 것인가』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