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다
박성현
마른 볕에 당신이 고여 있었다 뜻밖이라 한걸음에 달려갔지만 당신은 꼭 그만큼 물러났다 볼 수만 있고 닿을 수 없어 마음만 우둑했다 볕은 숲을 흔들면서 꽃가루를 날렸다 북쪽으로 떠나는 철새처럼 크게 휘어지고 출렁거렸다 하늘이 노랗게 덧칠되다가 물에 씻긴 듯 맑아졌다 너는 어디를 보고 있냐는 당신의 옛 물음 같았다 나는 소리가 없으므로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을 바라보는데 그만 몸이 무너졌다
-전문, (P. 226.)
▶ 중심 혹은 주체의 부재, 그 낯설음의 여정(발췌)_ 송기한/ 문학평론가
해체로 특징지어지던 문예적 흐름이 융성했던 시기는 잘 알려진 대로 1880년 후반이다. 지금이 2020년이니 대략 40년 전후의 편차가 있는 셈이다. 하나의 주조가 사라지게 되면, 전형기를 맞게 되고, 그것이 끝나면 또다시 새로운 주조가 형성되는 것이 문예학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이런 필연성에 기대게 되면 적어도 지금의 시점에서는 새로운 지배소가 나타날 때도 되었다. 하지만 지금 전개되고 있는 문단의 흐름은 어떠한가. 저 치열했던 80년대와, 이를 딛고 새로운 자리 정립을 모색해보던 신서정이 등장한 이후로 이를 대신할 새로운 주조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 실상 이런 질문 앞에 어떤 뚜렷한 정답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거니와 굳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하나의 사조가 명쾌히 정리되는 것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대항 담론의 출현 역시 현재로서는 무척 요원하기 때문이다. (P. 235-236)
박성현 시학의 주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응시의 미학에서 찾을 수 있다. 서정적 자아는 사물을 뚜렷이 응시하고, 또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아는 사물의 형질이나 고유성을 특정하려 든다. 하지만 사물은 그의 시선을 용인하거나 고정된 의미를 제공하지 않는다. 자아의 시선이 다가올수록 대상은 저 멀리 비켜서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몇 번 반복되지만 결과는 언제나 마찬가지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가 형성되지 않고 여러 다양한 이미지들이 흩어져 나타난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이미지들이 하나의 중심으로 모여지거나 동일한 의미 창출에 참여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끊임없이 만들어져 의식의 조각을 형성하고 있을 뿐이다. 독자는 그 만들어진 이미지를 통해서 그와 더불어 사유의 여행을 떠나기만 하면 된다./ 대상과의 거침없는 합일, 혹은 의미화의 과정은 시인에게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자아는 좌절하고 결국에는 굳건한 주체로 새롭게 탄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소리가 없으므로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을 바라보는데 그만 몸이 무너졌다"는 것은 이런 인식적 기반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하겠다./ 이와 함께 박성현의 시들의 또 다른 특징은 중심을 거부한다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아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지대에 뿌리박고 있는 중심축이 없다는 말이 적당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정된 시선을 갖고 있지 않다는 면에서 시인이 사용하는 의장들은 80년대 시인들이 흔히 구사했던, 데리다 식의 차연의 기법을 호환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인이 응시하는 것은 층위를 달라하는 시선이 아니다. 가령 하나의 지점을 정해놓고 이를 여러 각도에서 응시하는 의미의 다발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아니다. 이런 의장이야말로 해체의 독특한 수법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경우는 이와 썩 다른데, 이런 면들은 이 시인만의 고유한 수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P. 237-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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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산맥』 2020-가을호 <시산맥이 찾아가는 시인/ 신작시/작품론>에서
* 박성현/ 200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
* 송기한/ 1991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저서 『한국 현대문학의 정신사』 『서정의 유토피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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