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창백한 푸른 점/ 한정원

검지 정숙자 2020. 8. 21. 01:02

 

 

    창백한 푸른 점

 

    한정원

 

 

  바람이 사흘 동안 서북쪽으로 불고 있다

  비스킷처럼 부서지는 햇빛의 분말

  고요가 말줄임표를 찍으며 낮게 가라앉는다

 

  권태는 시간이 나에게 가하는 복수

  어둠에 핀을 꽂으며 다가오는

  새와 물고기는 같은 종이라고 말하는 너에게

  나는 물고기가 되어 거실에서 베란다로 유영한다

 

  보이저 1호가 보내온 사진

 

  숲으로 가는 길에 뿌린 빵가루가 까맣게 변색되고

  유통기한을 지키려던 통조림이

  진공으로 불룩해진 날짜를 들이민다

  십 리터의 물을 마시려고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린 나를

  믿고 싶지 않다

  두 가지 기억이 이어지지 않아 더듬거리는 혀의 갈증

  의미 없이 리듬만 타는 문장들

  백 페이지의 악보가 티끌로 사라지는 날들의 후기

 

  간식으로 챙겨 넣은 석류즙을 종점에 와서 마시고

  이어폰을 돌돌 말아 주머니에 넣으면

  소리 내지 못한 두 눈이 모자이크 뒤에 숨는다

 

  가끔 국제 어두운 밤하늘 협회에서 보내오는

  섬 한 채를 띄우고 길을 잃은 일행은 불을 밝힌다

  꽃의 노래는 많으니 따가운 가시의 노래를 부르자고

  새가 종잇장처럼 떨어지는 명왕성 사진의 뒷면

  꽃의 역사는 쉬우니 어려운 뿌리로 얘기하자고

 

  보이저 1호가 비가 온다고 말하면

 

  창밖을 내다볼 것이다

  눈물 한 방울 눈썹에 매달고 창문을 기웃거리는

  푸른 나비들의 더듬이

 

  죽은 사람도 바람결에 머리칼을 날리는 구름 아래

  내가 소홀히 보낸 하루하루가 꽃잎으로 물들다가

  흡묵지 아래서 순해진다

  창백하게 파랗게 혹은 까맣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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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산맥』 2020-가을호 <신작시> 에서

  * 한정원/ 1998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마마 아프리카』 『낮잠 속의 롤러코스터』 『그의 눈빛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