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표해록과 리더십
금시아
제주에서 추쇄경차관(도망한 노비나 죄를 지은 자들이 제주도로 달아난 경우가 많아 이들을 잡아들이는 일을 담당하던 벼슬)으로 재직하던 최부(崔簿, 1454-1504)는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제주 앞바다에서 표류된다. 그리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배 안의 소요와 불신, 배고픔과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명나라 저장성에 당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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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를 숭상한 조선 시대의 신분 사회는 무척이나 엄격했다. 그런데 표류하는 배에서 신분이 다른 43명이나 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14일 동안 한 명도 죽지 않고 살았을까?
최고 상관인 최부는 자신의 목숨이나 아랫것들의 목숨이나 똑같이 소중하다고 여겼다. 그는 신분과 계급에 상관없이 가장 위급한 사람부터 먼저 구했다. 또 비상식량마저 다 떨어져 오줌을 먹는 등의 아비규환 속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했다고 한다.
"리더의 조건은 단 한 가지, 오직 헌신이다"라고 존 맥스웰은 말한다. 그는 『리더의 조건』(비즈니스북스, 2012)에서 리더십은 과정의 법칙에서 형성되고, 매일매일 오랜 기간 동안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는 사람에게서 발현된다고 했다. 리더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어떤 어려움에도 헌신을 실천하며 목표 도달을 위해 값을 치르는 사람인 것이다.
최부는 해적을 만나 생명의 위협을 당하기도 하고, 왜구로 몰아 출세하려는 명나라 관리들의 음해와 무고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겪는다. 하지만 그의 문장과 학식을 인정한 중국 본토 지식인의 존중으로 조선 관인으로서의 공식적인 예우를 받으며 북경으로 호송된다. 부친상 기간이었던 최부는 우리의 상중喪中 예절을 고수해 명나라 황제 앞에서도 끝까지 상복을 벗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책임감과 선비 정신이 유독 강했던 그의 불굴의 의지와 원칙론에 입각한 리더십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최부는 표류된 지 136일 만에 8,800여 리의 중국 남 · 북을 관통하며 환국한다. 그는 성종의 왕명으로 일기 형식을 빌려 그간의 일들을 5만여 한자로 기록하였다. 바로 『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줄여서『표해록』으로 불림)이다. 이『표해록』에는 중국 강남 지역의 문물과 대운하 제도 등 세세한 견문의 관찰이 자세하게 사실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특히 그는 북경으로 호송되어 가면서 수차의 제작법과 이용법을 배워왔는데, 1469년 호서 지방의 가뭄 때는 이를 보급해 가뭄 극복에 크게 기여했다.
우리나라 사람의 중국 여행기로는 『조천록朝天錄』,『연행록燕行錄』등 여러 종류의 책들이 전하고 있지만, 대체로 국가 외교적 차원에서 왕래한 사신들의 견문 기록이며 그 여정의 한계선도 북경까지로 제한되어 있다. 반면에 『금남표해록』은 당시 조선인의 내왕이 전혀 없던 중국의 강남 지방江南地方에까지 표착해서 육로로 귀국하기까지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라는 점에서 다른 중국 기행기보다 더 가치가 높다 하겠다.
더구나 『표해록』은 당시 최고의 선비 출신의 작품이다. 신분이 낮은 층의 표류를 구술로 받아 쓴 작품들과는 달리 사실적인 축면에서 그 문학적 의의가 크다 할 수 있다.
최부는 『동국여지승람』과 『동국통감최부』의 편찬에도 참여한 출중한 학자였다. 주로 간관으로 일하고 홍문관 교리와 사헌부 지평과 감찰 등을 지낸 최부는 연산군을 향해 소신 발언도 굽히지 않았다. 곧고 강직한 청백리였던 그는 무오사화 때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를 갔고 결국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사화 때 참형을 당했다. 그의 나이 51세였다.
최부의 『금남표해록』은 생사를 넘나드는 여정이었다. 요즘의 교통망과 통신망을 상상할 수 없던 때의 바다는 죽음의 모험일 수밖에 없다. 어떤 목적의 여행이 아닌 갑자기 닥쳐온 죽음의 표류에서 최부의 리더십은 가장 이성적인 생각과 가장 이상적인 선택의 발휘였다. 지금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다소 생소한, 최부의 『표해록』은 당시 국문으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으며 일본에까지 전해지기도 했다. 이 『표해록』은 마르코 폴로의『동방견문록』,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세계 3대 중국 기행문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리더십은 공통된 목표를 향해 사람을 헌신적으로 이끄는 것이다. 아무리 쓰러져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매진하겠다는 하나의 약속이다. 헌신은 행동으로 평가받는다. 하루하루가 아무리 힘들어도 축적되고 쌓이면 싹이 나고 나무가 되듯 사람은 모이고 리더로 증명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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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과 인문에 관한 에세이 『뜻밖의 만남, Ana』 2019. 11. 20. <달아실> 펴냄
* 금시아/ 시인, 2014년 『시와표현』으로 등단, 시집『툭, 의 녹취록』『금시아의 춘천詩_미훈微醺에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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