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아버지의 연장/ 양문규

검지 정숙자 2019. 12. 12. 01:48

 

 

    아버지의 연장

 

    양문규

 

 

  가을도 깊어 막바지입니다. 지난 주말 천태산 은행나무 시제詩題를 성황리에 마치고 일주일여 만에 다시 천태산을 찾았습니다. 북고개를 넘어 영국동에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은행나무 옆으로 가기 전 자동차를 세우고 배나무집을 지나 예전 살던 여여산방을 찾았습니다. 작고 아름다웠던 여여산방은 온 데 간 데 없고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큰 기와집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위압적인 건물 앞에 한참 서성이다가 예전 여여산방에 살던 때와 같이 발걸음을 천천히 옮겨 은행나무 곁으로 갔습니다. 아버님이 이걸 봤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요.

  천태산 영국사 뒷방지기에서부터 천태산 여여산방까지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로 아버님의 도움이 컸습니다. 영국사 뒷방을 비우고 나와 일 년여 동안 빈집을 찾아다녔는데요. 운 좋게도 천태산 은행나무 옆 쓰러져가는 토담집을 구해 수리하고 살았던 집이 바로 이 터에 있던 작은 여여산방이었습니다. 아버님은 그때 집 수리에 필요한 건축자재를 손수 구입해 운반해주었을 뿐 아니라 여기에 사는 동안 온갖 궂은일을 다 맡아 해결해주었습니다. 심지어 겨울 땔감으로 인삼밭 지주목으로 사용했던 각목을 불 때기 좋게 잘라다 주기까지 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는지요. 해마다 천태산 은행나무 시제 때면 순양 동네 어른들과 함께 대형 해가림 천막을 쳐주는 것 또한 잊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다 국수를 삶기 위한 솥까지 걸어주기도  했었지요. 그리고 행사 경비에 보태라고 봉투를 주머니에 넣어주고 있으니 자식 사랑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는지요.

  천태산 여여산방에 살면서 흘렸던 눈물이 또 흐를 때가 많습니다. 여여산방 아래채 개축으로 민원이 발생하자 아버님과 어머님이 홍삼즙을 들고 영국사를 찾았던 일, 남고개 산책하다 영국사 관리소장한테 맞아 아버님 친구들과 찾아가 영국사 측의 해명을 듣고자 한 것이 주거침입과 명예훼손이라며 고소를 당한 일, 법정 싸움을 벌였을 때 아버지는 앞장서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품을 팔았습니다. 그런 노력도 무위로 돌아가고 결국 2014년 천태산을 떠나게 되었는데요. 그 이후 지금까지 부모님은 천태산을 찾지 않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연로하신 탓도 크지만 무엇보다 자식이 소원하며 살았던 산방을 떠나야 했던 아픈 기억을 떠올리기 싫었을 것입니다.

  매년 가을이면 아버님은 시제가 얼마 남지 않았지 하며 올해도 많은 사람이 와야 할 텐데……. 함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큰 아쉬움을 표합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버님이 천막 치고 솥 걸어줄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오니 아무 걱정 말라며 안심시킵니다.

  천태산 여여산방을 떠나오면서 많은 것을 버렸습니다. 아궁이에 걸고 썼던 가마솥을 비롯해 당장 쓰지 않을 물건들은 모두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애써 챙겨온 물건이 있는데요. 다름 아닌 낫과 호미와 삽과 괭이와 망치와 도끼와 쇠스랑과 갈쿠리 등 아버님의 연장이었습니다. 아버님 집에도 똑같은 연장이 있어 당장 쓸 필요가 없음에도 아버님의 사랑과 손때가 짙게 배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집을 수리하고 화단을 만들고 나무를 자르고 포개고 했던 그 연장들은 이후 삼봉산 여여산방에서 여전히 유용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여든네 살의 아버님은 평생 인삼농사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오랫동안 함께해왔던 연장을 필요한 사람에게 줘야겠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울컥! 뜨거움이 올라왔습니다. 아버님의 농사가 올가을 마지막 5년근 인삼 수확으로 끝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엄니와 나는 아버님 건강을 이유로 수년 전부터 농사짓는 것을 만류해왔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막상 아버님이 농사를 놓았다고 생각하니 여간 마음이 아픈 게 아닙니다. 나는 "아버지, 연장은 제가 다 써야 하니 그냥 둬요. 누굴 주긴 뭘 줘요." 급하게 전화를 끊고는 한참을 울었습니다.

 

 

  식량주의자였던 아버지 평생 농사꾼으로 산다

  논과 밭과 한 몸으로 연민할 것을

  사랑할 줄 아는 아버지의 연대

  쌀 보리 밀 콩 감자 고구마를 위하여

  일흔, 하고도 네 해 동안 보급 길 걸어왔다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땅속에 낙원이 들어앉길 바라진 않았지만

  똥막대기보다 못한 농사가 뭐 그리 대단해

  폐농의 논과 밭 밟지 않고 사월과 오월 사이

  거침없이 자운영꽃 자청한 검붉은 울음

  아직도 토해내는 것인가

  새파랗게 빛나는 농사는 어디에도 없는데,

   - 전문,「식량주의자」『식량주의자』(시와에세이, 2010)

 

 

  이 시는 딱 10여 년 전에 쓴 시로 제4시집의 표제작입니다. 그때 아버지는 "일흔, 하고도 네 해 동안"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보급 길"을 내내 걸어온 것이지요. "새파랗게 빛나는 농사는 어디에도 없는데" "똥막대기보다 못한 농사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렇게 농사를 지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식량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논과 밭과 한 몸으로 연민할 것을/ 사랑할 줄 아는 아버지의 연대"는 자식을 위한 농사였으니까요.

  그러고도 또 10년이 지나 올가을까지 아버님은 엄니와 내가 극구 반대하던  인삼농사를 강행했습니다. 못난 자식을 위한 고육지책으로 퇴직금과 같은 목돈을 만들어주겠다는 취지였는데요. 인삼농사는 여느 농사와 달리 토지 임대료부터 인삼밭 설비에 이르기까지 큰 자본이 투자됩니다. 그러니 자칫 잘못되면 투자한 자본마저도 건지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아버지는 2014년 읍내 보건소 옆과 2015년 심천 각계 경로당 앞 토지를 비싸게 임대해 인삼농사를 져서 올가을  4년근과 5년근을 수확했습니다. 예상한 것만큼의 소득을 올리지 못해 아버님 상심이 크게 보였는데요.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너만 고생시켜 마음이 아프다"면서 농사는 하늘이 뜻한 바대로 거둔 것이니 오히려 내게 너무 서운해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오랜 낡은 연장들이 많다

  어깨가 빠진 지게 이가 빠진 낫살 휘어진 갈퀴

  손자루가 부러지거나 몸통만 남은 괭이 삽 호미 망치 도끼

  녹슨 쟁기, 농사일에서 없어서는 안 될 크고 작은 연장들

  집구석 여기저기에 처박혀 있다

  한낮인데도 들판으로 나가지 않고 깊은 잠 속에 빠져 있다

  해 뜨는 이른 봄부터 해질녘 늦은 가을까지

  아버지의 손과 발이 되어 주던 연장들

  아버지 제 살붙이처럼 어루만지고 있다

  휘어지고 부러진 녹슨 연장보다

  흰머리 삐걱대는 팔다리

  캄캄한 눈, 들리지 않는 귀,

  자신의 몸뚱이가 더 늙고 병들었건만

  아직까지 밥만 축낸다며 볼멘소리를 한다

  저 연장들 잠만 잔다고 안타까워 그렁거린다

    -전문, 「아버지의 연장」(같은 책)

 

 

  오늘의 농사는 대부분 기계화가 되어 재래의 농기구가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농기구는 많은 농사꾼에게 유용한 보물처럼 집안 구석에 모셔져 있습니다. 아무리 기계화가 되어 농사짓기가 편리해졌다고는 하지만 기계가 닿지 않는 곳은 여전히 이들 농기구가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계가 할 일이 있고 농기구가 할 일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삼농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트랙터와 관리기가 인삼 식재 전까지 농기구가 할 일을 대신해주지만 그 이후는 삽과 괭이를 비롯한 재래의 농기구가 인삼밭을 만들어갑니다. 그러다 보니 아버님 집에는 온갖 농기구란 농기구가 여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인삼밭에 갈 때마다 언제나 손에 연장 하나를 들고 나갔습니다. 그게 삽이든 괭이나 낫이든 간에 인삼밭 관리를 위해 필요한 연장을 들고 나갔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 인삼농사를 내려놓게 되었으니 더 이상 이들 연장들을 집에 둘 이유가 없다고 여긴 탓일 것입니다. 아니 저 연장들 "저 연장들 잠만" 자는 것 볼 수 없다며 "안타까워 그렁거"라는 걸 보기 싫어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천태산 은행나무는 시제 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단풍 상태가 여전히 좋지 못했습니다. 다른 해 같으면 절정의 단풍을 보여주면서 비바람이 치면 노랑나비 떼가 일시에 하늘에서 내려와 주변 풍광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올가을 천태산 은행나무는 은행잎이 누렇게 변해 있고 남은 녹색 이파리마저 갈색으로 병들어 볼품을 잃고 서 있습니다. 처음 이 광경을 목격한 것은 지난 9월 초였는데요. 천태산 지킴이 유지동 대표는 "올가을 은행나무 단풍은 보기 힘들겠다" 말했습니다. 전화를 받고 달려갔을 때 마음이 푹 꺼졌습니다.

  올해 열한 번째 시제를 열면서 은행나무 단풍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게 딱 두 번입니다. 2010년 은행잎 물들기 전 된서리가 내려 우수수 떨어져 보지 못했고요. 올해는 잎은 그대로 매달려 있지만 잎마름병으로 변색되어 안타까움을 더합니다. 영동군은 10월 들어서 두 차례에 잎마름병 바이러스 치료를 위해 영양제와 방제작업을 실시했다면서 그래도 단풍이 이쁘게 물들 것으로 예상했는데 완전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치료하지 않았더라면 자연의 순리대로 이미 잎을 다 내려놓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훌가분하게 동안거에 들어 내년을 기약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햇살도 터져 내린 늦가을 저녁

  찬 서리마저 핥아 빨아먹고

  그렁그렁 한 주먹 살이 된

  아, 늙은 아버지

 

  아스라이 감나무에 매달려 있다

    -전문, 「홍시」(같은 책)

 

 

  은행나무 옆댕이 감나무는 은행나무와 달리 붉게 물든 감잎을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에 몇 개의 홍시를 아스라이 매달고 있습니다. 늦가을의 늦가을 "햇살도 터져" 홍시가 더 붉은 것처럼 보였는데요. 그때 옆댕이에서 늙은 아버지가 아들이 주최하는 은행나무 시제를 위해 천막을 치고 있고, 어머니가 국수를 삶고, 전국 각지에서 온 시인들이 국수를 먹기 위해 줄 지어 서있는 모습이 흑백사진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아, 늙은 우리 아버지" "그렁저렁 한 주먹 살이 되고서도" 어제까지 농사를 지었는데요. "자신의 몸뚱이가 더 늙고 병들었건만/ 아직까지 밥만 축낸다며 불멘소리를"하면서 "저 연장들 잠"자는 꼴 못 본다며 식량주의자를 고집했던 여든 네 살의 우리 아버지, 이제 농사를 그만 내려놓는답니다.

  아버님 집에 들러 아버지의 보물이었던 연장을 챙겨야겠습니다. 아버지의 연장은 이미 낡아 이가 빠지고 날이 휘고 자루가 부러지고 성한 게 별로 없어도 아버지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처럼 나도 그 연장들 아버지처럼 모시고 살아갈 것입니다. 세상 어떤 연장이 이보다 귀하고 아름답겠는지요. 여든 하고도 네 해, 아버지의 연장은 삼봉산 여여산방에서 또 다른 봄을 기다리며 한겨울을 지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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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에』2019-겨울호 <시에 산문 연재/ 여여산방_자연으로 가는 길 19>에서

  * 양문규/ 충북 영동 출생, 1989년『한국문학』으로 등단, 시집 『벙어리 연가』『여여하였다』등, 산문집『너무도  큰 당신』『꽃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논저『백석 시의 창작방법 연구』, 평론집『풍요로운 언어의 내력』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