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各自圖生
김효선
밤의 바다를 지난다
만선의 꿈을 실은 집어등의 불빛과
우후죽순 자라나는 해안의 가게들
없던 알레르기가 생겨나고
늙는 게 지루해서 등만 내미는 등대
마지막이라는 말을 꺼내기 위해
긴 밤의 바다를 지날 때
보드랍던 눈썹 하나 눈동자에 떨어져
바늘보다 더 날카로운 혀를 뱉어 내고
나이테가 있어야 나무가 자랄 수 있다면
풀은 마디마디 어제의 기분을 저장해 놓고
숲에서 잃어버린 사람을 봄에 마주친다고 해도
밤의 바다는 숲으로 가는 길을 묻지 않는다
해무가 세상의 전부일 때도 있는 것처럼
-전문-
해설> 한 문장: 김효선의 시에 '바다'는 다양한 얼굴로 등장한다. 가령 「먼 바다」에서 '바다'가 불투명성이 고유한 성질인 대상으로 그려졌다면, 「다시, 서귀포」에서 '바다'는 리비도를 투사할 대상으로 그려진다. 「다시, 서귀포」에서 시인은 지명의 유래에 관한 설화를 변주하여 '서귀포'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불멸을 구하러 왔다지. 서복"이 바로 그것이다. 옛이야기에 따르면 서복은 중국의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불사약과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파견한 인물이다. 그는 불로장생의 명약을 찾아 헤매다 한라산에 이르렀고, 끝내 원하던 것을 찾지 못하고 서쪽으로 돌아갔는데, 서귀포라는 지명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생"이나 "다시 돌아갈 곳", "다시 돌아갈 사람" 등은 모두 서귀포라는 지명의 유래에 얽힌 이야기가 모티프가 되어 만들어진 것들이다. 여기에서 '서귀포'는 "살고 싶어"지는 곳이자 "가장 뜨겁게 오래 피는 마을"로 그려지는데, 이는 시인 자신이 제주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진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각자도생」에서 형상화되는 '바다'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여기에서 화자는 '밤의 바다'를 지나고 있다. "만선의 꿈을 실은 집어등의 불빛"과 "우후죽순 자라나는 해안의 가게들"과 "늙는 게 지루해서 등만 내미는 등대"는 화자의 이동하는 시선에 포착된 파노라마적 풍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두운 밤바다를 배경으로 각각 강렬한 불빛을 내뿜고 있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을 떠올린 듯하다. 3연은 이 각자도생이라는 사건을 시간의 축에서 조명하고 있다. 풀의 "마디", 그리고 잃어버린 사람을 마주치는 계절이라고 규정되는 "봄"은 모두 시간에 관계된 사건들이다. 그러나 ":밤의 바다는 숲으로 가는 길을 묻지 않는다"라는 부정적 진술에서 암시되듯이 화자는 "밤의 바다"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실존적 고독의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듯하다. 이러한 태도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할 점은 화자가 "마지막이라는 말을 꺼내기 위해/ 긴 밤의 바다를" 지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홀로 밤바다를 지나면서 삶은 각자도생이라고 생각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면 화자의 내면이 어떤 상태인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니까 "해무가 세상의 전부일 때도 있는 것"이라는 말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삶에 대한 전망이 온통 불투명한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p. 시 144/ 론 155-157) (고봉준/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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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어느 악기의 고백』에서/ 2020. 4. 20. <문학수첩> 펴냄
* 김효선/ 제주 서귀포 출생, 2004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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