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여자 47호/ 김효선

검지 정숙자 2020. 5. 8. 02:32



    여자 47호


    김효선



  누군가 한밤중에 피아노를 친다

  작은 깃털과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달이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밤마다 내 몸에 천공을 내는 건반들

  나비가 누르면 꽃잎 떨어지는 소리 와르르

  내 잠을 한 번도 쉬어 본 적 없는 귀


  기다릴 게 너무 많은 사람이 나무로 태어난대

  가문비나무에서 불어오는 미레도 시도레도 라라라라


  어느새 벽을 소리를 가둔다

  비는 언제까지 내리기로 한 걸까

  아무도 그 벽을 허물지 못한다 딴딴딴

  벽이 걸어가지 못한 길은 빗방울이 대신 걷는대

  돌아가지 못한 빗방울이 나무의 소리를 갖는대


  조금만 더 살아 보자 살아 보자

  아직도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으로 키가 자란다면

  건반으로 벽을 열 수도 있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건

  내가 나를 버릴까 봐

  밤마다 나를 안고 꾸는 꿈


  꽉 조인 코르셋이 악어가 될 때까지 피아노는 멈추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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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어느 악기의 고백』에서/ 2020. 4. 20. <문학수첩> 펴냄

  * 김효선/ 제주 서귀포 출생, 2004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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