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시

신원철_ 또 하나의 걸출한 시인...(발췌)/ 땅파기 : 셰이머스 히니

검지 정숙자 2020. 3. 26. 15:11



                   땅파기


             셰이머스 히니(1939~2013, 74)



    내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 사이에는 짤막한 펜이

   놓여 있다, 마치 (어깨에 댄) 총 개머리처럼 딱 맞게.


    창 아래에는 삽이 자갈투성이 땅에 박혀들 때마다

                  선명한 삽날 긁히는 소리.

    내 아버지가 땅을 파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다본다

         꽃밭 이랑 사이에서 그의 팽팽한 엉덩이가

     나지막하게 숙여졌다가, 20년을 거슬러 올라가

             그가 리드미컬하게 땅을 파고 있던

      감자 이랑 사이에서 구부정하게 일어날 때까지.


투박한 장화를 삽날의 대가리에 얹으면, 종아리 안쪽에서

            삽자루는 단단히 지렛대 역할을 했다.

   그가 긴 줄기를 뽑아내고, 반짝이는 삽날을 깊이 박아 

날감자들을 툭툭 흩어주면 우리는 그것들을 집어 들고 손바닥으로

          서늘하고 단단한 느낌을 사랑스러워했다.


맹세코, 내 아버지는 삽자루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과 똑같이.


       내 할아버지는 토너스 보그의 어느 누구보다도

          하루에 더 많은 토탄을 잘라낼 수 있었다.

       한번은 내가 우유를 종이 마개로 막아 철럭이는

   병에 담아서 그에게 가져갔었다. 그는 허리를 쭉 펴서

           한 모금을 마시고는 금방 다시 허리를 굽혀

     깔끔하게 칼집을 내고 자르고, 어깨 위로 흙더미를

        들어 올리거나, 좋은 탄을 찾아 깊이 더 깊이

             땅을 파는 것이었다. 파는 것이었다.


       부드러운 감자의 서늘한 냄새, 물에 젖은 토탄이

    철벅이거나 철썩이는 소리, 단단한 나무뿌리를 쳐내며

잘라낸 짤막한 토탄덩이가 내 머리 속에 살아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따라할 삽이 내게는 없다.


           내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 사이에는

                   짤막한 펜이 놓여 있다.

             그것으로 나는 땅파기를 하리라.

                           -전문-



  ▶ 또 하나의 걸출한 시인 셰이머스 히니(발췌)_ 신원철/ 시인, 영문학자  

우물이나 늪은 히니(Seamus Heaney, 1939~2013,74세/ 1995년 『어느 자연주의자의 죽음』(Death of a Naturalist )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의 시에서 그의 어린 시절과 아일랜드의 역사를 말하는 향토색 짙은 상징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시 토속성은 흙에서 온다. 「땅파기」(Digging)라는 시는 좋은 예이다. 아버지(감자), 그 위의 할아버지(토탄), 조상 대대로 땅을 파먹고 살아온 현실은 시인으로 하여금 땅 대신 글을 파고 삽 대신 펜으로 그 작업을 하게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자신이 펜을 들고 글을 쓰는 창 밖에서 아버지는 땅을 파는데, 그 동작의 묘사에서 매우 토속적인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투박한 삽자루와 반짝이는 삽날을 깊이 박아 넣는 행위와 서늘한 감자를 캐 들고 사랑스레 들여다보는 행위는 매우 향토적이다. 농부의 자손 히니는 이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이 작품은 선조들의 땅 파기와 시인의 글 파기가 오버랩되어 아주 훌륭한 효과를 낸다.(p. 시 277-279/ 론 269-270.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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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함께』 2020-봄호 <영미시 이야기/ 또 하나의 걸출한 시인/ 셰이머스 히니의 대표시 3편> 에서

  * 신원철/ 시인, 영문학자, 시집 『닥터 존슨』외, 저서 『20세기 영미시인 순례: 죽은 영웅의 시대를 노래함』, 강원대 글로벌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