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정숙자 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그늘을 지우는 꽃, 꽃을 피우는 죽음 : 금은돌

검지 정숙자 2011. 11. 14. 02:16

 

    그늘을 지우는 꽃

    꽃을 피우는 죽음

           -정숙자의 시세계

 

           금은돌(문학평론가)

 

 

   1. 죽음으로 진입하라

 

   두렵다. 정숙자의 시를 말하기가. 매혹적이다. 그녀의 시가 펼쳐 보이는 죽음의 경계가. 그녀는 죽음 속에 언뜻언뜻 삶을 비추어 보이고, 삶의 진국이 우러나올 때, 정숙자는 죽음으로 확연하게 전환시킨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희미한 빛을 시에 드리운다. 그 빛을 발견하는 지점에서 아슬아슬하게 설렌다. 그렇다. 죽음이 두렵다. 두려움이 가져오는 불안이 삶의 언저리를 맴돈다. 그렇다. 죽음을 회피하는 삶이 두렵다. 삶을 두려워하는 미적지근함 때문에 죽음을 삶 속에 잡아 당겨, 마주하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그녀의 시에 진입하기 어렵다.  

   정숙자 시에 구멍을 뚫고, 그녀의 시를 흡입하기 위하여 말러의 교향곡 9번을 청해 듣는다. 정숙자의 시에 몰입하기 위해 화가 뭉크의 [절규]를 찾아서 본다. 정숙자의 시를 응시하기 위해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를 찾아 읽는다.『형상시집』,『신시집』,『두이노의 비가』,『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번역시집이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죽음은 위대하다./ 우리는 입에 웃음을 띤 / 그의 것일 뿐이다. / 우리가 삶 한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면,/ 죽음은 우리 가슴 깊은 곳에서 마구 울기 시작한다.”1)는 시구 앞에서 멈추어 본다. 죽음 속으로 진입해 들어가면서 가슴 깊은 곳에서 생의 의지를 불태우는 시인 릴케의

정신을 더듬어 본다.  

   릴케는 죽음으로 시를 썼다. 죽기 위해서 시를 쓰고,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시적인 상황에 몰입하였다. 릴케는 냉철하게 전환한다. 그리고 로댕의 조각 작품을 관찰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자신의 문학 방식을 넘어설 요구가 있었다. 내면을 토로하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방식으로 시를 쓰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릴케는 로댕의 예술을 연구하면서 조형예술의 원리를 통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다. 로댕2)의 고독을 발견한 것이다. 고독은 예술가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사안이다. 로댕과 만남 이후 릴케는 시 쓰기라는 단어 대신 ‘작업’이라는  어휘를 사용한다. 이 작업은 ‘수공업’과 같은 성실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정숙자 시인의 작업은 ‘고독’의 한가운데서 이루어진다. 집에 배달되는 문예지 등을 통독하고), 가지런히 공책에 정리한다. 그녀는 남들이 쉽게 따라올 수 없는 반듯한 글씨체로 책의 내용을 기록한다. 공책을 펴고 연필을 깎고 지식을 씹어 먹는다. 들뢰즈를 읽고 보들레르를 읽고 만해를 읽는다. 그녀는 기억 속에 지식의 한 자락을 되새김질하며 저녁 산책을 한다. 한강변을 거닐고 새벽이라는 작업 공간에 홀로 들어선다. 그녀의 작업은 지속적이고 일관되어 있다. 성실한 노력으로 내공을 쌓는다. 오로지 문학만이, 오로지 시만이 그녀의 대화창구이다. 그녀는 언어라는 고요한 수단을 가진, 치열한 투우사이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에서 죽음이 차지하는 역할에 대해 논한다. 철학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는 죽음과 문학의 죽음을 구분하며3), 문학의 두 번째 죽음에 대해 설명한다.4) 블랑쇼는『문학의 공간』에서 릴케의 문학적인 죽음에 주목한다. “릴케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우리가 경험하게 될 죽음의 덧없는 다양한 겉모습에 대한 고발이 아니라, 삶과 하나를 이루고, 죽음과 삶, 이 두 영역이 합쳐져서 더 넓은 통일된 공간을 이룬다.”5)는 것이다. 릴케는 시인으로서 더 큰 차원을 얻기 위해서 죽음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다름 아니라 시인은 죽을 수 있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다.  

 

   정숙자의 시는 사유의 지평이 확연히 달라지고 있었다. 최근, 문예지에 발표한 시들을 살펴보면 죽음에 관한 사유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후, 시가 견고해졌다. 시적인 사유의 출발이 죽음이었다. 죽음으로 죽음을 거슬러 올라가, 죽음을 극복하는 화법이었다. 죽음은 오히려 시인에게 황홀의 순간이다. 죽음은 살아있음을 가능하게 하는 역설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리스 블랑쇼는 말한다. “죽음 앞에서 스스로의 주인일 수 있어야만, 또 죽음과 절대주권의 관계를 맺게 될 때에만 우리는 글을 쓸 수 있다.”6) 죽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2. 죽음의 얼굴, 바라보기

 

  공동묘지 무섭다 마라

  우리네 뱃속은

  그보다 서늘한 협곡이니

 

  척추를 깔고 잠드는 짐승 어디 있는가

  새는 앉아서, 말은 서서, 개 고양이 나비조차 꼬부리거나 매달려 잔다

  즉각 대처할 수 있도록(…) 잠정적으로 달리는 것이다

  천적 말고도 온갖 목숨 들이킨 인간만이

  큰大字로 뻐드러져 염치없는 배를 하늘에 들이댄다

  바람이라도 지나가다 깨울라치면 뿌리치고 돌아누워 더 깊은 잠을 탐

한다

 

  몇 굽이 창자 안에 그리 무안한 저주파가 흐르다니!

   ―「食葬」부분

 

   정숙자는 세상을 낯설게 바라볼 줄 아는 ‘눈’을 획득한다. 일상에서 벌어진 모순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 내면에서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의식이 선명해질수록 예전에 보이지 않던 사실들이 분명해진다. ‘내밀한 전환’7)이 이루어진 것이다. 내밀한 전환은 눈에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고, 보이던 것마저 낯선 사물로 전환시킬 수 있는 힘을 준다. 그 바라봄엔 거침이 없다. 두려움이 없는 어조가 단호하고 강단이 있다.

   “공동묘지 무섭다 마라” 감정적 흔들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사위를 고요히 가라앉히는 고독의 공간이 자리할 뿐이다. 시인이 주목한 것은 인간의 몸뚱이다. 식욕이다. 인간의 내장이다. 복부이다. 그곳은 삶을 위해 죽음을 받아들였던 장례식장이었다. 이러한 발상으로 바라보았을 때 지금까지 인간은 헛것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두려움의 대상이라고 믿었던 것이 정작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인간만이 “염치없는 배를 하늘에 들이대”고 “척추를 깔고 잠드는” 유일한 짐승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식욕은 “끊임없이 육탈-소화-복제”를 되풀이하는 욕망의 도가니였다.  

   이에 따라 사람은 “걸어다니는 무덤”이 된다. 그러하니 누가 감히, 남 탓하며, 세상사의 혐오스러움을 욕하고 죽음을 회피할 수 있겠는가? 죽음을 먹고 사는 인간의 미욱함이 자명한 것을. 잘난 체 하며 최첨단 아이패드를 가지고 다니는 인간이 복부에 “해체된 주검”가지고 다니는 것을. 죽음은 이렇게 삶을 침식하고 있었다. 다만 외면하고 싶은, 혹은 거부하고 싶은 그림자였을 뿐이다. 시인은 삶 속에 침윤된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볼 것을 독자들에게 요구한다. 

   그러기 위해서 시적 주체는 시적 상황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다만 대상을 직시하는 힘이 강해졌을 뿐이다. 감정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죽음이 그녀의 시세계의 지평을 드넓게 한 것이다.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힘은 시인의 시선을 강화시켰다. 블랑쇼에게 죽음은 ‘나’라는 주체가 그 앞에서 자기성(自己性)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이는 개인성에 매

몰되지 않고 사물을 바라보는 사유력을 강화시킨다. 죽음을 통해, 로댕에게서 보는 법을 배웠던 릴케처럼, 작품과 시인을 분리시켜 바라보는 힘을 얻게 한다.8)  다시 말해 시적 주체와 사물의 관계를 끊고, 사물 그 자체가 가진 내밀한 운동성으로, 사물이 스스로 말하게 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작품은 시인의 손을 떠난다. 그리하여 언어가 저 혼자 굴러가, 홀로 공간을 형성하고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의 사물이 된다.9)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죽음에서, 비인칭의 죽음으로 보편화되듯이, 이것이 될 수 있고, 저곳에 위치할 수도 있는, 죽음으로, 사물은 스스로 존재한다. 그러니, 그녀의 시선으로 인간을 보라! 죽음이 산재해 있음을.

 

 

  2. 사물의 발견, 관계의 발견

 

               죽은 나무는 비로소 견고하다

  죽은 나무는 죽었다는 사실이 어둡지 않다

  다시는 죽을 뻔-하지 않아도 된다, 는 지점에서 여유를 만난다

 

  영원히 죽었다, 는 자각

  다시 죽지 않아도 됨이야말로

  다시 살아야 해요-보다 몇 킬로그램 퀼리티가 높다

  죽음에겐 주어진 방점이란 뭐니 뭐니 뒤집어도

  역시 완벽한 피리어드죠

  와우 와우우 박장대소 일렁인다

 

  어림없는 허리 지지하는 버팀목이

  돌아가신 나무의 분절이라는 것, 하 고마운 아기가로수들

  結을 草를 報恩을 용쓰며 바람에 실어 보낸다

  기특도 하지 ‘鬼神’을 홀리다니!

  결 깊은 주검들이 ‘정성껏’ 묘목을 에워싼다

  -「절망 추월하기」부분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한 시인의 눈에는 무엇이 포착될까? 시인은 사물과 사물의 관계성을 꿰뚫어 보는 시선을 갖는다. 첫 번째 시「食葬」에서 삶과 죽음의 내밀한 연관성을 부각시켰다면,「절망 추월하기」에서는 사물과 사물의 관계에 스며든 삶과 죽음의 관계를 추적한다. 아기 가로수들은 죽은 나무를 통해 지지를 받고 살아나간다. 그러므로 “죽은 나무

는 비로소 견고하다”

   “죽은 나무는 죽었다는 사실이 어둡지 않다” 그 이유는 죽음 이후, 전환이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죽은 나무는 아기가로수의 버팀목이 되고, 서고(書庫)를 가득 채운 책이 된다. 죽음은 다른 형태로 사물을 전환시키며 각자의 위치에서 제 몫을 한다. 죽음 역시 존재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것을 지탱시킨다. 죽음은 빛나는 “사리(舍利)”였던 것이다.

   이 명쾌한 전환은 “와우 와우우” 박장대소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그 다음에 주위를 둘러보니 “들뢰즈 만해 미당 보들레르 보르헤스…” 시인이 즐겨 읽는 책들이 보인다. 저자가 죽었지만, 죽음을 바탕으로 출판된 책은 현존하는 인간에게 지혜를 선물한다. 책이야말로 죽어서야 산 자들을 빛나게 해 주는 도서관인 셈이다. 깨달음을 얻을 때 웃음이 터진다. 오히려 “여유”가 생긴다.

   죽음은 지속적인 운동성을 가지고 활동한다. “결 깊은 주검들이 ‘정성껏’ 묘목을 에워”싸고 있다. 이것은 “다시 죽지 않아도 될 세계” 곧 영원성으로 진입하는 순간에 돌입하게 됐음을 의미한다.

  정숙자는 모성적인 차원에서 죽음을 바라본다. 다름 아닌 ‘모성적 죽음 ’을 실현하는 장면에 주목한 것이다. “기특도 하지”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사물과 사물의 흐름 속에서 시인은 저 무의식의 밑바닥에서 여성성을 자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 죽음이 생명을 살리고, 죽음이 펼쳐진 책을 통해 지혜를 얻고, 다시 죽음으로 후세에 전해질 생명이 싹트기

때문이다. 비인칭 사물의 죽음에, 고개가 숙여진다.

   “절망도 열정”이었기에, 시적 대상에게서 영원성이 발견된다. 희생적이고 모성적인 순환 고리에서,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련성이 드러난다.

 

 

   3. 꽃의 전환, 사물의 전환

 

   꽃 속에 너트가 있다(면

   혹자는 못 믿을지도 몰라. 하지만 꽃 속엔 분명 너트가 있지. 그것도 아주

아주 섬세하고 뜨겁고 총명한 너트가 말이야.)

 

 

   난 평생토록 꽃 속의 너트를 봐왔어(라고 말하면

  혹자는 내 뇌를 의심하겠지. 하지만 나는 정신이상자가 아니고 꽃 속엔

분명 너트가 있어. 혹자는 혹 반박할까? ‘증거를 대봐, 어서 대보라고!’ 거참

딱하구나. 그 묘한 걸 어떻게 대볼 수 있담.)

 

   꽃 속에 너트가 없다면 아예 꽃 자체가 없었을 것(이야!

   힘껏 되받을 수밖에. 암튼 꽃 속엔 꽉꽉 조일 수 있는 너트가 파인 게 사실

이야. 더더구나 너트는 알맞게 느긋이 또는 팍팍 풀 수도 있다니까.)

 

   꽃봉오릴 봐봐(요.

   한 잎 한 잎 얼마나 단단히 조였는지. 햇살 한 올, 빗방울 하나, 바람 한

줄기, 먼 천둥소리와 구름의 이동, 별들의 애환까지도 다 모은 거야. 그리

고 어느 날 은밀히 풀지.)

 

   꽃 속의 너트를 본 이후(부터

   ‘꽃이 피다’는 ‘꽃이 피-였다’예요. 어둠과 추위, 폭염과 물것 속에서도 정

점을 빚어낸 탄력. 붉고 희고 노랗고 파란… 피의 승화를 꽃이라 해요. ‘꽃이

피다!’ 그렇죠.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늘을 지우는 꽃(을

   신들이 켜놓은 등불이라 부를까요? 꽃이 없다면 대낮일지라도 사뭇 침침

할 겁니다. 바로 지금 한 송이 너트 안에 한 줄기 바람이 끼어드는군요. 아

~ 얏~ 파도치는 황홀이 어제 없던 태양을 예인합니다.)

  -「꽃 속의 너트」전문

 

 

   정숙자는 사물 안에 잠재해 있던 운동성을 발견한다. 주목한 대상은 “이다. 시인이 발견한 것은 “”속에서 “너트”를 봤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발견해 가는 전개과정이 흥미롭다. 우선 “꽃 속에 너트가 있다(면”이라는 가정법으로 시작한다. 가정법은 사실로 구현된다. 아예 과거에서부터 아예 꽃 속에 너트가 있었음을 증언하는 과거형이 된다.(아직은 가정법 과거형이다) 이 설정은 3연으로 가면서 아예 전제를 뒤집는다. “꽃 속에 너트가 없다면 아예 꽃 자체가 없었을 것(이야!”라고. 전환이 발생한 것이다. 상상의 공간에서 시인은 얼마든지 사물을 번역할 수 있다. 내면의 공간이 내밀해 질수록 사물은 시인의 독특한 내면의 언어로 전환 가능하다. 바로 여성적인 사물로의 전이이다.

   시인의 가정법은 끝이 날 줄 모른다. 꽃의 기원이 어디였는지, 어디서 끝나고 어디로 시작할 것인지 그 구분을 알 수 없다. 보이던 사물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전환하면서 꽃은 낯선 차원으로 잠입해 들어간다. 스스로 (정말 너트처럼) 움직이고 스스로 존재한다. 시는 자신의 리듬을 스스로 발산하며, 공간을 확대시킨다. 그리고 서서히 투명해진다. 가시적

인 꽃을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안내하던 시는 불현듯, 구체적 사물로 우뚝 선다. 이제 “너트 내밀한 전환이 가지고 온 독특한 사물이 된다. 정숙자는 끊임없이 진동하면서 파동하는 “너트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독자들에게 청유한다. 꽃봉오릴 봐봐(요.” 라고. 우리는 이 대목에서 주의 깊게 생각해 봐야 한다. 왜 시인이 독자들을 끌어들였을까, 하는 점이다. 무엇을 강조하고 싶었을까, 하는 점이다. 시인은 현실에 충실하고 싶어 한다. ‘무한히 죽는 자’10)가 되어 글을 쓰는 이유는 치열하게 살기 위함이다. 다음 시구를 보라! 그의 노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시인이 발견했던 너트에는 “햇살 한 올, 빗방울 하나, 바람 한 줄기, 먼 천둥소리와 구름의 이동, 별들의 애환”이 들어있었다. 이 땅에서 소중한 결실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었다. 삶의 열매들은 죽음과 더불어 맺혀 있고, 삶과 더불어 죽어 있었던 것이다. 죽으면 죽을수록 생(生)이 치열해지는 역설이랄까? 이 작은 것들은 노력하며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하니 “꽃 속의 너트를 본 이후(부터” 인식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부정을 넘어선 긍정적인 에너지가 샘솟는다. “그렇죠. 그래요. 그렇습니다” 강한 긍정이 재차 반복된다. 꽃은 이제 단순한 꽃이 아니다. 빛나는 사물로 승화된다. 죽음을 넘어서는 지점에서 발산되는 생(生)의 의지는 더욱 강렬해지리라. 통과의례와 같은 죽음을 거친 뒤 맞이하는 생(生)이기에 다른 차원의 의미를 획득하리라. 삶과 조화를 이루는 죽음은 의미 공간을 확장하며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한다. “그늘을 지우는 꽃으로 존재 자체가 탈바꿈하는 것이다. “너트”는 이미 “태양을 예인”할 정도의 능력을 갖는다.

 

   시인은 「꽃 속의 너트」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무엇을 바라보고 싶어 한 것일까? 블랑쇼는 말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존재의 진리로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존재의 진리가 존재의 오류에로 나아간다.”11) 작품은 진리가 아닌 발견이라는 사실이다. 글쓰기는 ‘진리의 조건으로서의 방황’이 아니라 ‘방랑의 조건으로서의 진리’12)라는 사실이다.

  시인 정숙자는 진리를 넘어서는 발견을 보여준다.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기에 “”을 색다른 사물로 인지할 수 있었다. 가시적인 것 속에 머물지 않고, 사물의 독특한 질감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물의 독특한 길을 열어줌으로써 사물 자체를 구원한다. 더불어 시인 자신을 구원한다. 그 누구의 시선도 아닌, 껍데기를 쓰고 있지 않은, 순수한 시선을 획득하며 사물에 내재한 비밀을 발견한 것이다. 불확정성 속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고뇌하는 지점에서 사물이 다가와 말을 걸어주었을 게다.

   이것은 형식적인 차원에서도 독특한 플롯을 갖게 한다. 시인의 불안정하고 불확정적인 심리는 가정법을 낳았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을 놓치고 싶지 않다. 무의식의 지평을 열어, 바깥으로 흘러넘치는 중얼거림을 놓아두고 싶다. 이성의 검열과 판단 아래 감춰진 무의식의 언어들이 스스로 중얼거리고 싶어 했던 게다. 내면의 화법을 시인은 괄호로 처리한다.

 “(”은 외면에 걸쳐두고, “)”은 내면의 영역에 남겨둔다. 중얼거림이 터져 나올 것 같지만, 독자가 믿어주지 않을 것 같고, 이미 시인은 확고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기에, 언어 자체가 굴러가고 있는, 흐름을 따라 아예 맡겨둔 것이다. 너트의 형상처럼 시의 형식이 소용돌이친다. 시인의 소곤거리는 중얼거림이 일정한 리듬으로 반복적으로 흐른다. 그리하여 정숙자는 사물의 공간을 열어놓는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4. 한 칸의 시선, 오르페우스의 시선

 

   한 칸 때문에 엎드릴 것이다

   깎고 팔 것이다 바람을 키울 것이다

 

   한 칸 때문에 뒤척일 것이며 물렁뼈 깊어질 것이다

 

   휙휙 휙 머리 날아갈 것이다

   맑은 강 바라기도 할 것이다

 

   (그 한 칸이야 기둥이었다가 대들보였다가 서까래였다가 툇마루였다

가…, 에라 그게 다 타고난 분모이렷다.)

 

   그 한 칸에 쏟아 부은 기도들이

   창이었음을 지붕이었음을

   문득 문득 깨치게도 될 것이다

 

   한 칸의 우울, 한 칸의 쓰라림

   붓다에게도 그 한 칸은 있었을 것이다

 

   그 한 칸이 바로 그를 해결한 미소였을 것이다

              -「비대칭 반가사유상」전문

 

   비어있는 “한 칸”은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공간일 게다.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 미완성의 허물어짐일 게다. “한 칸”은 존재가 존재자의 물질적 고독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존재로 변화가능하게 만드는 촉매제일 게다. “한 칸”은 시인이 물질과 물질 사이에서 명상을 가능하게 하는 삼각 피라미드일 게다. “한 칸”은 멋들어지게 삿갓을 기울인 조선 선비의 멋스러움일 게다. “한 칸”은 완벽을 기대했다가 돌아오지 않는 부메랑이고, “한 칸”은 죽도록 사랑하던 사람을 구원하는 순간, 금기를 깨뜨리는 오르페우스의 시선일 게다.

   그렇다. 시인은 스스로 ‘무한히 죽는 자’이다. 오르페우스13)처럼. 그녀는 오르페우스의 시선으로 금기를 넘어선다. 오르페우스의 시선14)은 부재에 대한 매혹을 품는다. 정숙자는 이 “한 칸”의 결핍이 불러 올 에너지를 알고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죽음을 대면하는 일이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금기를 어기며 지옥을 되돌아봤던 그리움의 매혹을 체득한다.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살리고자 하는 열망 너머에, 부재하는 순간에 그녀를 오히려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부재의 순간에 온전히 그녀의 존재를 느꼈다. 다가가면 만져질 듯하나, 쉽게 만지지 못하도록, 안타깝게 바라보도록, 놓아두는, 공간이 바로 “한 칸”이다. 이 비어있음 때문에 시인은 노래 할 수 있다. “한 칸”이 채워졌더라면, 오르페우

스는 노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불어 「비대칭 반가사유상」의 “한 칸”은 ‘영감’이 다가올 수 있도록 열어놓는 비어있음이다. 깊은 밤, 달빛이 스미도록 창문을 열어두는 것처럼, 영감을 받아들이는 기다림의 묵정밭이다. 시인은 “한 칸”에서 명상을 하고, 침묵하며 인내한다. “한 칸”은 시를 마무리 짓는 수공의 세심함이 필요한 공간이며, 무심함이 닿는 아릿한 떨림이다. 그리하여 “한 칸의 우울, 한 칸의 쓰라림”은 “붓다에게도” 존재했을 것이라는 가정법이 설득력을 얻는다. 더불어 금기를 어기고 싶은 해방감이며, 작품 완성 뒤에도 찾아오는 허전함이라는 것까지. 불완전이라는 미지의 영역이 있기에 시인은 다시 시를 쓰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5. 죽음, 이후

 

    정숙자의 시를 읽으니, 죽음 이후에 비춰지는 한줄기 빛이 떠오른다. 그 빛줄기 속에서 죽음을 넘어서는 긍정의 세계를 엿보인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렇다. 우리는 죽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죽음은 나를 빚어내고, 나로 인해 죽음이 만들어진다. 시인의 죽음은 작품으로 완성되고 있었다. 작품 속에서 시인은 스스로 초월하고, 성숙하고 있었다. 삶과 하나를 이루는 죽음, 삶과 죽음이 교차하며 드넓은 공간을 획득해 나가고 있었다. 불확정성의 어느 지점에서 오류의 어떤 지점으로, 금기를 깨뜨리며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여전히 말러의 교향곡 9번이 흘러나온다. 음악이 가리키는 곳에 릴케의 묘비명이 보이는 듯하다. 그곳에 태양을 예인하는 꽃이 있으리라.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렇게도 많은 눈꺼풀 아래

   그 어느 누구의 잠도 아닌 기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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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1) 라이너 마리아 릴케, 김재혁,「형상시집」,『두이노의 비가』, 책세상, 131면. 

2) 릴케는 로댕의 조각 작업에 영향을 받아 시 세계를 변화시킨다. 자신의 시를 조형물과 같은 하나의 예술 사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끊임없는 작업을 통해 사물을 만드는 것, 그러나 돌이나 진흙이 아니라 언어라는 재료를 사용하여 완결된 예술사물을 만드는 것이 시적과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사물시’라고 불리는『신시집』의 시적 토대를 얻는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릴케의 로댕』, 미술문화, 1998, 160-167면.

3) 블랑쇼는 인간이 자기를 스스로 지배한다고 여기고 주체의 권력에만 집중하는 철학은 인간을 자기가 속한 세계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이성의 힘에 기대어 홀로 선 주체야말로 인생의 의미를 설명해 줄 것이라고 보는 철학 태도는 인간이 제 자신을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오기 때문이다. 죽음이 문학의 기묘한 힘에 속한다고 보는 블랑쇼의 죽음 개념은 우리가 지배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오히려 문학은 우리 위에 있는 어떤 힘, 우리가 다시 발견해야만 하는 것이다. 울리히 하세 ․ 윌리엄 라지, 최영석, 『침묵에 다가가기』, 앨피, 2008, 83면.

4) “문학을 경험하면 죽음을 두 가지로 사유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 둘 간의 차이는 블랑쇼가 말했듯이 책과 작품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죽음의 첫 번째 측면이 자기 작품인 책을 대표하고 그래서 자기가 한 일을 자축하며 그 기교를 칭송받는 작가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반면에, 글쓰기의 현실에 가 닿을 수 있는 것은 블랑쇼가 작품이라고 부른 두 번째 죽음이다. 우선 저자가 어떤 책을 쓰게 만든 것은 작품이다. 이미 작가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한다기보다 글쓰기의 요구에 응답하고 있다. 책은 작품이 요구하는 바를 다할 때만이 실체를 가질 수 있다. 그렇지만 문학작품은 형용할 수 없는 존재의 비밀인 개별성에 속하므로 어떤 책도 작품의 요구를 만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죽음의 첫 번째 측면이 막 성공을 거두려는 찰나에 두 번째 측면이 나타나 실패의 경험으로 바꾸어 놓는다. 따라서 문학은 죽어가는 경험과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 블랑쇼의 말처럼 언어가 작가의 의도를 표현하는 대신에 작가의 권위 있는 목소리를 익명의 언어 뒤로 사라지게 한다면, 문학 작가는, 자기의 작품 속에서 죽는다.” 앞의 책, 123-124쪽.

5) 모리스 블랑쇼, 박혜영,『문학의 공간』, 책세상, 1990, 189면.

6) 앞의 책, 123면.

7) 앞의 책, 199면.

8) 필자는 이런 관점을 살펴보면, 릴케가 사물시로 전환하면서 깨달은 점을 떠올리게 된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말을 나 자신에게 연결시키는 관계를 깨뜨리고 나로 하여금 한 사람의 너에게 말하도록 하는 관계를 거역하는 것이다. (…) 시선은 작품에 의해 포착되고 말들은 글을 쓰는 자롤 바라본다. 블랑쇼는 이를 매혹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에마누엘 레비나스, 박규현,『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 동문선, 19면.

9) "사물. 제가 이 낱말을 말하고 있으니, 고요가 생겨납니다. 사물을 둘러싼 고요입니다. 모든 움직임은 가라앉아 윤곽이 되고, 과거와 미래의 시간으로부터 영속적인 어떤 것이 완결되고 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릴케의 로댕』, 미술문화, 1998, 108면.

10) 에마누엘 레비나스, 박규현,『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 동문선, 24면.

11) ‘방랑의 조건으로서의 진리’는 블랑쇼의 입장을, ‘진리의 조건으로서의 방랑’은 하이데거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앞의 책, 29면.

12)「두이노의 비가」마지막에서 릴케는 ‘무한히 죽은 자들’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 “머무른다는 사실 속에 자신을 감금하는 자는 벌써 화석이 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언제나 이미 작별을 고하는 것, 하직 인사를 받는 것, 또 지금 존재하는 것들과 하직하는 것이다. (…)우리가 심연에 닿는 순간, 이별을 심오한 존재에 도달하는 순간으로 만들 수 있다. 전환, 이것은 가장 내밀한 곳으로 가기 위한 움직임이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변모하면서 모든 것을 변모시키는 이 작업은 우리의 종말과 무관하지 않다.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우리가 책임지고 완성시켜야 하는 이 변모는 지금까지 우리가 인정하기가 그리도 힘들었던 죽어야 한다는 우리 인간의 임무 그 자체이다. 죽는다는 것은 일종의 노력이다.(강조는 필자) 모리스 블랑쇼, 박혜영,『문학의 공간』, 책세상, 1990, 208-209면.

13)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인 오르페우스는 죽은 아내를 살려내기 위하여 지옥으로 내려간다. 오르페우스는 매혹적인 노래로 지옥의 신들을 매혹시켰다. 그리고 아내를 데리고 지옥의 문을 빠져나오려는 순간 금기를 어기고 만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명을 어긴 것이다. 결국 에우리디케는 영영 죽음의 세계에 갇히고 만다.

14) 블랑쇼는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인 오르페우스를 통해 예술과 밤을 설명한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향해 지하로 내려갈 때, 예술은 밤을 열리게 하는 힘이다. 밤은 예술의 힘을 통해 오르페우스를 맞아들인다.” “그리스 신화는 말한다. 우리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깊이의 무절제한 경험이, 그 경험 자체로 추구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깊이는 정면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깊이는 작품 속 제 모습을 감춤으로써만 모습을 드러낸다.” “글을 쓴다는 것은 오르페우스의 시선과 함께 시작한다.” “에우리디케를 뒤돌아보는 오르페우스의 시선은 신성한 밤을 옭아놓는 끈을 풀어버린다. 그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본질을 포함하고 억제하여 고정시키고 있던 법을 부수어버린다.” “오르페우스의 시선은 작품에 대한 염려를 해방시킨다. 그로써 자기 자신에게, 자기의 본질의 자유에, 자유인의 자기 본질에 신성함을 준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이 시선의 결단 속에 달려 있다. 그 결단 속에서 그 시선의 힘에 의해 기원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이 순간은 욕망의 순간이며, 염려하지 않는 무관심과 권위의 순간이다.” 『문학의 공간』, 260-26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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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지』2011-겨울호 <애지 초대석/ 작품론>에서

  * 금은돌/ 2008년 『애지』로 등단, 주요 논문「김수영의 ‘꽃잎’에 나타난 수사학적 특성」,  현재 중앙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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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블로그주: 인용 시「食葬」은 시집『뿌리 깊은 달』(2013, 천년의시작)에 수록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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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은돌 평론집『한 칸의 시선』에 수록되었음(시작 비평선 0017)/ 2018. 8. 13. <천년의시작>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