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마음으로만 굿바이/ 황병승

검지 정숙자 2019. 7. 27. 15:53

 

 

    마음으로만 굿바이

 

    황병승(1970-2019, 49세)

 

 

  차창에 기대어 아름다운 모습으로 잠들었을 때 나는 네가 그 상태로 숨이 끊어져 아름다움을 완성하길 바랐다 긴 머리 원피스 녹색 타이즈의 소녀여 땀에 젖은 속옷이 열기를 뿜어대는 밤 우리는 조금 가까워졌고 가슴속 네발 짐승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어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안녕, 널 보내주고 싶은데 컹 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아

 

  이봐, 신사 양반 좀 점잖게 굴어! 그런데 가만, 이 미친 계집애가 오히려 내 목을 물어뜯을 셈이군 뻐근해, 싫어 이 기분

 

  차창에 기댄 너의 발그레한 두 뺨이 슬프게 떨릴 때 나는 네가 그 슬픔 속에서 심장을 움켜쥔 채 고꾸라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제발 내 옷소매를 놓아줘 축축한 양말이 미끌거리는 밤 가슴속엔 으르렁거리는 이빨들이 추위에 떨고 있어 긴 머리 원피스 녹색 타이즈의 소녀여 너를 이렇게 두어도 될까!

 

  이 더러운 계집애 이 더러운 계집애, 가랑이 속에 냄새 나는 털을 잔뜩 품고 있으면서! 구역질 나, 싫어 이런 감정

 

  미안해 미안해, 말하고 싶지만 사나운 발톱이 네 얼굴을 못쓰게 만들어버릴 것 같아 다가서고 싶지만 널 한입에 물어 죽일까 두려워

  너는 부드러운 손길 다정한 목소리 모두 나에게 주었지만 나는 너에게 줄 것 아무것도 없고 너를 얌전히 보내주기도 싫어 쥐죽박죽의 머리칼이 불처럼 타오르는 밤 너를 이대로 보내도 좋을까! 긴 머리 원피스 녹색 타이즈의 소녀여, 마음으로만 마음으로만 굿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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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트랙과 들판의 별』에서/ 2007.9.7. 초판 1쇄, 2008.11.17 초판 4쇄 <(주)문학과지성사> 발행

  * 황병승/ 1970년 서울 출생, 2003년『파라21』에「주치의 h」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여장남자 시코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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