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우남일_ 김만옥, 그리고 60년대 말 광주 산책(발췌)/ 춘궁 : 김만옥

검지 정숙자 2019. 7. 18. 17:18

 

 

    춘궁

 

    김만옥(1946-1975, 29세)

 

 

  보리밭 속에서 꿈이 떠난다.

  코중배기에 구멍이 뚫린 검은 고무신의

  그대 지게막대기에 까투리가 날듯

  햇빛과 땀이 어울리고 퇴비로 뿌려진

  모든 들판에서 꿈이 떠난다.

 

  달구지에 목화꽃 같은 새벽을 싣고

  버드나무 개울을 돌던 그대 잠방이,

  이슬을 차면 이슬 속에서 깨어져 나오던

  거대한 해와 종달새의 노래가

  이젠 보이지 않는다.

 

  연기는 소멸되고 소는 운다.

 

  그대는 잘 알고 있다. 들판은 결코

  그대의 뿌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김을 매다가 자칫 그대 자신이

  잘못 뽑아 버린 스스로의 뿌리,

  들판은 어차피

  그대 목숨의 뿌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죽음 같은 잠뿐이다. 남은 것은

  다박솔 숲 속을 찾아가는 그대의 허기

  새의 둥지를 빌리는 잠뿐이다.

 

  그러나 그대가 잠을 청하면

  꿈은 마침내 혼자만의 밤,

  혼자만의 잠에서마저 떠나고 만다.

  멀리멀리 떠나고 만다.

 

  그대는 죽은 꿈의 관일 뿐이다.

    -전문-

 

 

  ▶ 김만옥, 그리고 60년대 말 광주 산책(발췌)  

  만옥형이 서울에 올라와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때는 내가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한 이듬해 1975년 겨울, '석류' 동인 선배에게서였다. '시론詩論' 과목을 담당하시던 신동욱 교수로부터 강의 도중 전라도 광주에 김만옥이라는 천재 시인이 있었다는 언급을 듣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무작정 상경하다시피 한 서울의 겨울은 우리 지방학생에게 유난히 추웠다. 매서운 한파가 낯선 서울역 주변 만리동고개를 휩쓸고 있을 때였다.단칸방에 연탄불을 지피며 사과궤짝을 책상 삼아 자취를 하던 그 시절 우리의 궁핍한 삶의 한편에는 농약을 마시고 저세상으로 스스로 떠난 만옥형의 모습이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혼령처럼 맴돌았다. 만옥형도 서울을 그렇게 올라왔구나.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땡전 한 푼 없이 그렇게 올라왔구나.

  드라마의 비극에는 눈물을 곧잘 훔쳐도, 안타까운 실제를 바라볼 때 사람들의 시선은 의외로 냉혹했다. 죽은 만옥형을 살아 있는 이들은 쉽게 나무랐다. 홀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어린 자식을 그렇게 두고 극단을 택한 만옥형을. 하지만 참으로 여리고 순전한 만옥형이 살아가기에는 그때의 이 나라는, 그리고 서울은 참으로 힘들었다, 차가웠다. 가난은 곰팡이처럼 음습하게 우리들의 삶의 응달부터 차근차근 파랗게 멍들게 했다. 만옥형은 생계에 지쳐 있었다. 매우 고단했다. 유달리 감수성이 짙고 자존심이 강한 만옥형이 감내하기에는 이 한국의 계절은 변화무쌍했고, 겨울 추위는 혹독했다. 특히 수도 서울이 더 심했다.(p.423-424.)

 

  그때 만옥형에게는 원고지만이 유일한 생존의 수단이었다. 돈이 될성부른 현상문예라면 만옥형은 가명假名으로 투고해서 상금을 챙겼다고 그를 아는 이들 가운에 힐난조로 말하는 이도 있었다. 독재와 탄압의 그 시절, 신춘문예보다 국토통일원과 문화공보부 등 상금이 더 많은 국가기관의 친정부 주관 현상문예에서도 만옥형은 상금을 모조리 휩쓸어 갔다. 심지어 만옥형이 시보다 고료가 훨씬 많은 소설에도 손을 댔다고 했는데, 1971년《대한일보》와《전남일보》신춘문예에 각각 소설이 당선되고, 1972년에는 상금 규모가 가장 크다는 5·16민족상에 소설이 당선된다. 중앙 문단과 일면식도  없고, 당시 특정 원로급 문인들의 계파에 의해 문단을 좌지우지하던 동국대 국문과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학적도 아닌, 이 변두리의 광주, 등록금과 생활비가 없어 조선대 국문학과를 중퇴하고 마는, 이 왜소한 체구에 말주변도 없는 만옥형의 글재주를 누가 당해 낼 수 있으랴. 만옥형의 문학 훈련은 순전히 독학으로 이루어졌다. 자신을 도닥여 줄 선배 문인들과 일면식도 없는 그로선 오로지 문학서적을 탐독하며 사숙할 뿐이었다. 문단계보에서 아웃사이더인 그를, 그러나 그를, 그 뺴어난 역량을 재경在京 심사위원들은 결코 탈락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p.425-426)

 

  내가 만옥형을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50년이 넘은 1967년 2월이었다. 고교 1년 선배인 송기원 형으로부터 광주시내 고교생 문학서클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광주시내 글깨나 쓴다는, 각 고등학교 문예반장 중심의 '석류' 문학동인이었다. '석류' 모임 그때 만옥형을 만났다. 만옥형은 그 당시 조선대 국문과 학생이었으나, 그는 고교생인 우리들의 우상이었고 신화적 존재였다. 시집(『슬픈 계절의』)을 고교 시절에 이미 출판하였고, 고등학생 신분으로《전남일보》신춘문예에 가작 당선된 만옥형은 내가 만난 그해 67년『사상계』신인문학상에「아침 장미원」으로 당선하여 중앙문단에 정식 등단하게 된다. 고교생 잡지『학원』에서 낯익게 대한 이름 석 자 김만옥을 이렇게 '석류' 모임에서 선후배 상견례로 만난 것이다.

  사실 나는 만옥형을 잘 모른다. 고교시절 몇 번 여러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대했을 뿐이다. 그것도 '석류' 모임에서다. 그가 석류 후배 우리 고교생들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다는 기억이다. 만옥형은 연락이 닿으면 애써 우리들을 찾았다. 허나 고교 때 만옥형의 시편들을 나는 별로 대한 적이 없다. 원고청탁을 받고 나서 초중고 시절 광주를 떠올리고, 만옥형의 유고시집 『오늘 죽지 않고  오늘 살아 있다』(새미, 요절 시선집 시리즈 3, 2007)를 읽으면서 컴퓨터 자판을 두들긴 것이다. 이 글은 내가 겪은 문학소년기를 보낸 광주의 추억담으로 여백을 메운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송기원 형과 함께 만옥형을 광주 충장로의 우체국 로비에서 처음 만났다. 우린 '우체국'을 '우다방'이라 불렀는데, 마땅히 모일 곳이 없는 우리들에게는 우체국이야말로 즐겨 만나는 약속장소였다. '우다방'은 서울로 치면 명동의 '돌체'요, 혜화동 서울대 문리대 건너편의 '학림'이었다. '석류' 회장이 된 필자는 만옥형, 기원형에게 문학동인회 운영에 대해 많이 의지했다. 

  군복을 까맣게 물들인 작업복 차림에 운동화, 검정 테 안경을 쓴 작은 키의 김만옥은 어눌한 말투에 조용히 미소를 짓는 표정으로 일관했다. 차분하나 한편 과묵한 성격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해 봄 문학의 밤의 행사 관계로 대선배인 만옥형이 대학생 신분으로 우리 후배들을 돕게 된 것이다. 그래 녹음이 짙어질 무렵 '석류 문학의 밤'은 광주 YMCA강당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청중이 강당 좌석을 메우고  통로의 입석까지 꽉 찼다. '문학의 밤' 행사는 남녀 고교생들의 옷자락이 부딪치는 설렘의 장소를 제공해 주었고, 건달 같은 학생들의 삶을 고상하게 해주는 정서적인 메인홀이었다. 고교생으로서 변변한 놀 거리, 즐길 거리도 없는 60년대 삭막한 문화적 환경이 어디 광주뿐이랴. 만옥형과 '우다방'에서 만나 점심때면 우체국 건너편 대각선으로 금남로 쪽에 우리들이 좋아하는 메밀국수집이 있었는데, '산수옥'이었다. 산수옥에서 뜨끈뜨끈한 메밀국수 온면을 깨끗이 비우고 나와 우리는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대중가요처럼 입을 맞추어 합송했다. 빈털털이였으나 그 주머니를 문학의 향훈이 든든하게 채워주었다.(p.428-429.)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공원에 두 사람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하나는 김남주(1946-1994, 48세)요 하나는 김만옥(1946-1975, 29세)이다. 김남주는 80년대 민주사회를 갈망하며 싸워 나간 행동의 시인이요, 김만옥은 70년대 질곡의 삶을 판화처럼 정확하게 찍어 낸 사색의 시인이다. 김남주 시인이야말로 이 나라 운동권은 물론이요, 시대의식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인지하는 현실참여의 대표적 시인이다. 김남주의 시는 널리 이 나라 청년들에게 회자되는 반면 김만옥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한국문단에서조차 김만옥은 잊혀졌다. 그러나 김현승 선생 이하 한국 시단에 걸출한 시인들을 배출한 광주에서 유독 김만옥을 파헤쳐 시비를 올려 세웠다.

  이 두사람은 46년생 동갑으로 광주에서 청춘을 불태우다 요절한 시인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허나 나의 인식으로 볼 때 두  사람의 시세계는 대조적이다. 김남주의 시가 원심력遠心力의 확장에 있다면 김만옥의 시는 구심력求心力의 심화에 있다. 곧 김남주의 문학이 거시적이라면, 김만옥의 문학은 미시적이다. 김남주는 강고한 사회투쟁을 추구하며 치열하게 브라만(Brahman)의 넓이를 펴 나간다. 김만옥은 섬세한 내면의식을 탐구하며 아트만(Atman)의 깊이를 조근조근 파헤친다. 남주의 시에서 역동성을 느낀다면, 만옥은 자아의 변화를 꾀한다.

  브라만과 아트만의 조화, 그리고 그 대립을 넘어선 변증법적 결합, 즉 범아일체梵我一體 물심일여物心一如의 세계, 이것이 바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 이상세계이며, 예술이 갖추어야 할 완벽한 미의식이리라. 이 양자를 결코 배타적 관계로 설정해서는 안 된다. 이 양자를 두고  어느 하나만을 분명히 택하라고  요구한다면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어느 한쪽만 집어 다른 한쪽을 강요하고 폄시하는 사회가 바로 암흑사회이다. 참다운 예술세계는 스펙트럼이며, 무지갯빛을 지향해야 마땅하다. 이 두 대조적인 시인을 등가等價에 놓고 시비를 함께 세운 광주가 아름답다.(p.4428-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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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예바다』2019-여름호 <문학산책 - 김만옥 시인 회고기> 에서

  * 우남일/ 2001년 문학평론 등단, 저서『트레블 에세이』『여행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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