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분의 사랑
배영옥(1966-2018, 52세)
나의 미소가
한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준다는 걸 알고 난 후
나의 여생이 바뀌었다
백날을 함께 살고
백날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가슴속에 품고 있던 공기마저 온기를 잃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로
내 몸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리의 세상을 필쳐보기도 전에
아뿔싸,
나는 벌써 죄인이었구나
한 사람에게 남겨줄 건 상처뿐인데
어쩌랴
한사코 막무가내인 저 사람을……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시는 비상한 뜨거움으로 한 생애에 "백일"만이 남았던 사람이 어떤 "늦은 사람"(「늦게 온 사람」)과 함께 한 고통과 사랑의 시간을 적고 있다. 고통이 "온기"를 뺏어가고 "죄"를 심어주는 닫힌 나날은 그러나,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의 발명 가운데 저도 모를 사랑을 향유하는 듯하다. "어쩌랴"에는 사랑할 방도가 없음에도 사랑을 끌어안고 말았던 기쁜 무장 해제의 마음이 묻어난다. "백날"이 "일생"이 되는 까닭이 여기 있지 않을까. "여분의 사랑"은 곧 사랑의 전부였던 것이다.(p. 121.) (이영광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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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에서/ 2019. 6. 11. <문학동네> 펴냄
* 배영옥/ 1966년 경북 대구 출생, 1999년《매일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뭇별이 총총』, 여행 산문집『쿠바에 애인을 혼자 보내지 마라』, 2018년 6월 11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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