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나의 농부/ 정의홍

검지 정숙자 2019. 5. 15. 23:09

 

 

    나의 농부

 

    정의홍(1944-1996, 52세)

 

 

  잠을 털어내고 아침은 일어선다.

  가난한 농부들이

  숨소리는 꽃물같이 묻어나고

  풍선처럼 커오르는 한줌의 소망,

  굴뚝 뒤에 숨은 나의 비밀이

  바람의 손톱에 찔려 찢어졌을 때

  툭툭 떨어지는 용기와

  게으름이 조을고 있는 아침의 발견.

  굴헝진 길바닥을 날은다.

  입김이 몽롱한 길바닥에 넘어져

  다사롭게 불지르는 한낮의

  노곤한 한낮의 햇살은 하품을 하고

  시린 손끝을 녹이듯

  알찬 인정은 교감하고 있다.

  설익은 작업과

  메말라붙은 아내의 말씀을 다스리고

  나는 날은다.

  쓰라린 출발의 걸음 속에서도

  후조候鳥들의 멍든 울음은 발 끝에 차이고

  우리는 가난한 노동자

  우리는 가슴앓이 마을에서 자라나

  빛 잃은 얼굴속의 웃음을 건져낸다.

  억울한 아우성이 돋아날 때마다

  살살 뒤돌아보며 논둑길로 달아나는

  여우의 간사한 몸짓처럼

  옆눈질하는 나의 농부, 나의 힘

  삭아버린 뼈마디가 부서지고 있다.

  이랑 가득히 피로는 깔리고

  피로 속에서 시들은 주름살을 편다.

  귀를 열면 모두가 배고픈 냄새,

  찬 이슬이 새벽을 적실 때

  아아 나의 발치에 쌓이는 푸른 작업이여.

  우리는 굶주린 농부들

  삽을 들면 삽날에 묻어나는 신앙이 있다.

  아침의 길모퉁이에 밀려오는 아이들

  상처난 영혼의

  저렇게 어지러운 먼지를 닦아내고

  말라붙은 뱃가죽의

  그 끈질긴 투쟁을 낚아 올리는 소리.

  고요히 돌아누운 질투의 소문

  그러나 나는 믿지 않는다.

  핏멍이 든 우리들의 어지러운 영토에

  노랗게 핀 꽃의 애기를,

  쟁기 끝에 파닥이는 우리들의 평화를,

  나래치고 있다.

  나는 삼삼히 물들고 있다.

  잃어버린 산야의 허리끈을 풀면서

  풍선처럼 커오르는 한줌의 소망.

  목마른 흙의 입은 다물어지고

  나의 생활은 피곤하다.

  밤처럼 피곤하다.

    -전문, 『정의홍 전집 1』, 33~35쪽

 

 

   * 일민 정의홍一珉 鄭義泓: 1944년 경북 예천 출생, 1967년 『현대문학』3회 추천 완료로 등단, 시집 『밤의 환상곡』『하루만 허락받은 시인』, 저서『정지용 시 연구』, 『현대시 작품론』(공저) 등,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 수료, 1984년부터 대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 1996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별세/ 사후에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 동국문학상 등 수상, 1999년 대전대학교에 시비 건립, 『정의홍 전집』(1~2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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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사지 『일민一珉 정의홍 시인 23주기 추모 세미나 및 시낭송회』에서

  * 날짜:  2019.5.11. 14:(토) 14: 00-16:30

  * 장소: 『불교평론』사무실

  * 주최: 정의홍시인추모기념사업회(대전대국어국문학과총동문회, 동국문학인회, 미네르바문학회, 휘문고문예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