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작품론

정숙자_단정, 단아하며 은은한 성취/ 울금 : 안차애

검지 정숙자 2018. 8. 17. 14:33

 

 

   울금

 

   안차애

 

 

  키 큰 작물이라고 생각했던가

  딱딱한 과채라 생각했을까

 

  파초와 칸나 중간쯤 되는 울금 잎 보고 놀랐네

  시월 하순에도 밭둑 가득 차오른 푸른 잎사귀

  너무 넓고 겁먹은 표정

 

  앎 직하지만 모르는 이름

  조금 예쁘고 조금 서럽기도 한 이름

  늦가을에 피운 꽃송이가 부끄럽다는 듯

  늘어뜨린 잎 속에 엉거주춤 꽃을 감추고 있는 울금

 

  나는 부모님이 시골의 백모에게 몇 년간 대리양육을 부탁한 아이

  친딸이 아니어서 백모는 늘 나를 예삐라 불렀지

  예쁘지 않아도 내내 예쁘다고 불러주는 이름처럼

  내놓고 울지도 못하는 울먹

 

  파랗게 질린 게 아니라고

  한사코 처음의 색깔과 지문을 꼭 쥐고 있지

  촘촘히 금 간 시간을 깨물고 있지

  아직 처음의 궁음도 열지 못한 얼굴

  마지막 각음도 닫지 못한 몸짓

 

  이제 그만 쏟아져도 괜찮아

  가을은 슬프고 아픈 엄마

  꼭 꼬집어 우릴 붉게 울려주지

 

  딸꾹질로 울음을 참고 있는 표정

  지레 입술부터 깨무는 버릇

  착한 얼굴을 터뜨려 쩌렁쩌렁 울어보렴

  예쁜 이름 밀어서 마음껏 사지를 버둥거리렴

   -전문-

 

  * 오음(五音):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단정, 단아하며 은은한 성취_정숙자   

  시인은 자신의 삶에 끼어드는 희로애락을 독자적으로 표현할 자격과 임무가 공인된 사람이다. 어렵사리 취득한 그 자격과 임무를 온전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언어능력을 가꾸고 확장시켜야만 클리셰(cliche)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제아무리 기발한 발상과 영감이 깃들었다 할지라도 기표와 기의의 운용력이 선취되지 않는다면 모처럼의 신의 선물, 즉 원석에 해당하는 영감의 빛을 ‘허무’라는 테두리 속으로 유산시키고 만다.

  안차애 시인의 시 「울금」은 ‘울’ ‘금’이라는 낱낱의 어감에서부터 금지된 울음을 연상케 한다. 그런 까닭에 궁금증과 시적 비전에 대한 자극을 일선에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울금’은 ‘튤립’의 다른 이름이지만, ‘튤립’이라는 명사가 주지 못하는 언어자체의 울림을 화자는 선택한 것이다. “내놓고 울지도 못하는 울먹”이라는 문장에서 ‘울금’이 주는 이미지는 한층 아프게, 선명하게 다가온다. “파초와 칸나 중간쯤 되는 울금 잎 보고 놀랐네” 게다가 “너무 넓고 겁먹은 표정”이라고 주관화한 바로 이 부분에서 안차애 시인의 독자적 노에시스가 스미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파초나 칸나의 넓고 큰 잎은 대개 시원스러운 이국적 향수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대시사에서 울금향이 등장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널리 알려진 정지용의 「카페 프란스」이다. “鬱金香 아가씨는 이밤에도/ 更紗 커-틴 밑에서 조시는구료!// 나는 子爵의 아들도 아모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히여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大理石 테이블에 닷는 내뺌이 슬프구나!”(『鄭芝溶 全集 ① 詩』, 1988. (주)민음사)

  또한 “이 작품이 시대의식이나 정치/상황 인식의 토대 위에서 씌어진 것이라는 주장은 성립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보아 ‘제1단계의 鄭芝溶 詩〓物理詩의 단면을 드러내는 순수시’의 등식은 수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金容稷 著 『韓國現代詩史 1』, 1996. 한국문연)

  그렇다. 순수시! 안차애 시의 “나는 부모님이 시골의 백모에게 몇 년간 대리양육을 부탁한 아이”라는 데서 정지용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라고 술회한 바로 그 심층이 동류의 것으로 빗댈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럴 때는 꽃조차 “궁음도 열지 못하는 얼굴”로 보일 뿐 아니라 “마지막 각음도 닫지 못한 몸짓”으로 밖에 비쳐오지 않는 법이다. “딸꾹질로 울음을 참고 있는 표정/ 지레 입술부터 깨무는 버릇/ 착한 얼굴을 터뜨려 쩌렁쩌렁 울어보렴/ 예쁜 이름 밑에서 마음껏 사지를 버둥거리렴.” 이런 독백 역시 “오오, 이국종 강아지야/ 내 발을 빨어다오./ 내 발을 빨어다오.”라는, 자기 위안일 수밖에 없는 침묵의 말에서도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 본연의 (순수한) 슬픔이 겹쳐지는 단면이다.

 

  슬픔의 색조는 어른과 아이의 것이 다를 리 없다. 무대나 배역에 따라서도 다르지 않으며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나름의 언어로 뿜어져 나올 따름이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본질이기 때문에 누구나 함께 느끼고 이해하며 수용하게 된다. 식물이 단순한 식물로 읽히지 않고 실존적 삶에서의 누빔점, 또는 노에마로 안겨오는 「울금」은 화자가 자신의 신산했던 궤적 안에서 (자격과 임무의 성실한 수행자로서) 신중히 길어 올린 성취로 자리한다. 내용과 테크닉의 직조가 단정하고 단아하며 여운 또한 은은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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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산맥』2018-가을호 <제9회 시산맥 작품상 후보 작품추천 사유>에서

  * 정숙자/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