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작품론

정숙자_내가 읽은 외국시 한 편/ 두 개의 빈 병 : 기유빅

검지 정숙자 2019. 2. 19. 00:58

 

 

  두 개의 빈 병 

                                                      

 

  으젠느 기유빅(1907-1997, 90세)

 

                                                        

  헛간의 구석에

  두 개의 빈 병,

  바람은 기와지붕과

  사방의 벽을 흔들고 있다.

 

  지구의 중심이 끌어당기고

  빛이 붙잡고 있는

  두 개의 초록색 병.

 

 

 

   Deux bouteilles vides

 

   Eugene Guillevic

 

 

  Deux bouteilles vides

  Au grenier dans un coin.

  Le vent secoue les tuiles

  Et la charpente.

 

  Deux bouteilles bertes

  Qu′attire le centre de la terre

  Et que retient la lumière.

 

  *출전 : 『가죽이 벗겨진 소』, 1995, 솔/ 이건수 옮김

 

 

  ♣ 관조 · 분석 · 압축

  으젠느 기유빅(프.Eugene Guillevic1907-1997)은 단순축약법의 거장이다. 그는 브르타뉴의 바닷가에 면한 소읍 카르낙Carnac에서 태어났다. 당시 어머니는 양재사였고 아버지는 선원이었다. 그러나 2년 뒤인 1909년-아버지가 순경으로 전직했고, 기유빅이 12살 되던 해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브르타뉴 지방은 거센 바람과 히이드가 물결치는, 몹시 척박한 땅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곳을 ‘대지에 바다가 스며드는 성스러운 장소’로 여겼으며 처녀시집 『테라케』의 원천 역시 유년시절을 보낸 브르타뉴에 연유했다고 한다. 그곳은 기유빅에게 생래적 통찰력과 감수성을 움트게 한 원초적 출발지였던 것이다.

  'terraque'는 만물의 근원이라는 뜻을 내포한 개념. 여기 옮긴 「두 개의 빈 병」은 『테라케』에 수록된 “사물들”-17편 중 하나다. 기유빅은 퐁주ponge와 마찬가지로 그 무렵 문단의 주조였던 초현실주의의 현란함을 뒤로 돌리며 일상성과 구체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사물의 시’의 시대를 새로이 열고자 했다. 퐁주가 섬세한 언어로 사물을 세밀히 묘사하는 데 천착할 동안 그는 가장 단순한 형태로 독자적 성찰과 인식을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시학」이라는 시에서 “모든 언어는 외국어처럼 낯설다”고 피력한 기유빅. 한 편 한 편의 시를 쓸 때마다 다른 각도에서 언어를 바라본 그의 노고가 짐작되는 대목이다.

 

 

    동양의 깊이가 관조에 있다면, 서양의 속도는 분석에 기초한다. 종교와 예술을 통틀어 그 핵심 분자가 동서양의 문명과 문화를 이끌어왔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팽배로 말미암아 황금만능주의가 극으로 치닫는 현 시점에서 우리는 네오르네상스(Neo-Renaissance)를 꿈꾼다. 네오르네상스에 대한 열망은 동서의 통합은 물론이요, 이미 크로스오버문학의 시대를 열어놓았다. 시나리오나 소설을 융합하여 시를 쓰는가하면 사진이나 이디오그램(ideogram)까지도 소통에 참여한다. 두보나 엘리엇이 살아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들 또한 메디올로지 시대의 복잡다단함을 전전반측 고심하려니.

    기의를 드러냄에 있어 파롤의 역할은 과학적 치밀함을 요구한다. 주제와 매개가 용의주도하게 맞아떨어져야만 작품은 ‘익은 과일’이 될 수 있다. 술덤벙물덤벙 되는대로 주워섬겼다가는 죽도 밥도 아닌 땡감을 수확하는 데 그치고 만다. 작품의 구도와 결론은 통상 원고지 이전에 얼추 마련되지만 생활환경과 언어군, 인식과 미래지향이 결정적 벡터/텐서가 된다. 기유빅의 『테라케』에 실린 “사물들”에서도 <나무 장(欌), 낡은 사기 접시들, 두 개의 빈 병, 가죽이 벗겨진 소, 탁자 위의 사과>등이 ‘의미전달’을 위한 도구로 쓰였다. 사물과 시안의 접점에서 언어의 과학적 탐색, 또는 텀블링이 진행되었다고나 할까.

 

 

  “시, 이 어두운 등불을 들고 나는 어느덧 반생을 건너왔다. 나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뼈를 깎고 피를 말리며 눈물을 삼킬 수 있었다는-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매 순간 스스로 선택하고 고민했으며 극복이라는 과제를 운명 앞에 선사했다. 하여 나의 삶은 줄곧 안락이나 화엄과는 먼 거리에 놓여졌다. 그러나 그 또한 유익치 아니한가. 고독에서 풀려날 겨를 없으니 어찌 뭉툭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날카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불타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육신과 이성이 건강을 유지하는 한 詩! 그 어두운 등불은 내 의지와 시력을 시험할 것이다.”

 

  위 단상은 2009.2.1-12:46 내 ‘생각은행’에서 꺼낸 일점이다. ‘생각은행’이란 여기저기 수시로 끼적거린 메모들을 정리해두는 노트의 이름. 이런 공책에 나는 日記라는 명사를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언뜻언뜻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란 나에게 있어 단순히 일기가 아니라 특별한 사건이고 재산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념들은 신으로부터 받은 삶의, 노역의, 사유의 대가가 아니겠는가. 한 줄 두 줄, 혹은 반 토막짜리 푸념이라 해도 나는 반드시/소중히 ‘생각은행’에 기입한다. 티끌만한 ‘생각’을 돌보지 않고는 기발한 ‘영감’에 도달할 수는 없음. 그러므로 한 편의 시란 머나먼 우주로부터의 발생이며 파장이리라.

  기유빅의 「두 개의 빈 병」을 처음 읽었을 때, 내 머리 속에선 쿵! 소리가 났다. 두 개의 빈 병 속에 자아와 더불어 우주물리학까지를 거뜬히 구겨 넣은 기량에 경외감이 솟았다. 바람이 지붕과 벽을 흔들어대는 데도 끄떡없이 서 있는 빈 병은 바로 기유빅 자신의 정신이 아니었을까. “지구의 중심이 끌어당기고/ 빛이 붙잡고 있는/ 두 개의 초록색 병”은 외아와 내아가 아니었을까. 두 개의 병이 똑같은 ‘초록색’이라는 점, 둘 중 어느 하나가 쓰러졌다거나 물질이 들어 있지 않은 점에서도 그의 철학적-문학적-미학적 추구가 ‘내외의 균형’에 있었음을 가늠케 한다.

  빈 병임에도 불구하고 지구의 중심이 되어진 두 개, 아니 한 개의 병! 이건 하이쿠나 절구(絶句)와도 다르다. 사물에 대한 관조와 실존의 심층 분석을 동시에 아울렀다. 그러면서도 이 시의 아우트라인은 중력이론에까지 이른다. 기유빅을 일컬어 “보다 많은 것을 의미하기 위하여 보다 적게 말하는 단순축약법의 거장”이라고 언표한 옮긴이의 평가는 참이다. 과거의 시인이지만 여전히 미래의 시인으로 현존하는 시인, 과거의 시이지만 여전히 미래의 시로 읽히는 시 사이에서 우리는 또 다른 새로움과 색다름을 모색해야 한다. ‘내 어찌 ‘생각은행’에 휴무를 도입할 수 있으리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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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2009년 6월호 <내가 읽은 외국시 한 편>에서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