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라는 즐거운 지옥*
이만식
네가 있어서, 네가 있어야 하니까, 나는 있을 수가 없어. 그래서 지옥이야, 즐거운 지옥이야. 너의 말이 아니라, 너의 어조를 읽어야 하니까, 너의 손짓을 알아야 하니까, 지옥이야, 즐거운 지옥이야. 네가 있어서, 네가 있어야 하니까, 나는 자부심을 가질 수가 없어. 네가 있을 자리가 있어야 하니까, 나를 죽여야 해. 그러니까 지옥이야. 그러니까 즐거운 지옥이야.
-전문-
* 2014년 어느 늦은 봄날 저녁, 가천대학교 학부생들인 정만찬 그리고 최덕환 제군들과의 대화를 한 뒤에 얻은 시
해설> 한 문장: '너'라는 타자는 '나'의 바깥에 있는 또 다른 '나'다. '나'는 객체-타자인 '너'와 얽히며 산다. '나'는 '너'의 어조를 읽고, 몸짓의 의미를 해독한다. '나'는 대상과 기표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미작용의 연쇄 내에 존재한다. 실은 '나'는 기표들의 내부로 스미지 못하고 그 바깥으로 미끄러져 사라진다. '나'는 없고 현실에 남은 것은 언제나 '너'다. 그런 맥락에서 '너'라는 객체-타자 자체가 "즐거운 지옥"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부재의 가능성이다. 존재의 빛 속에서 '나'는 나에게서 벗어나 달아난다. '(나는) 있다'라고 표기할 때 '나'는 부재한다. (장석주/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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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너라는 즐거운 지옥』에서/ 2018. 6. 15. <시산맥사> 펴냄
* 이만식/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하느님의 야구장 입장권』『거꾸로 보는 한국문학사』외, 문학평론집 『해체론의 시대』, 번역서 존 캐루악의 『길 위에서』1 · 2권, 조너던 컬러의 『해체비평』등, 연구서 『T. S. 엘리엇과 자크 데리다』 『영문학과 상호 텍스트성』외, 학습서 『영미문학개론』 『실용 영어』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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