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음시계
정채원
겉모양 화려한데 잉크가 나오지 않는 볼펜들
필통에서 한 자루 잡히는 대로 잡는다
너는 깨어날 것이다, 죽지 않을 것이다
글자가 써지면 너는 회생이다
겨우내 얼어 있던 연못이 봄이면 꽃나무를 받아쓰듯이
시계는 오늘도 소란하게 죽어간다
두 개의 바늘을 제 살에 꽂고
신음소리, 째깍째깍
구름에 매달린 링거는 보이지 않아도
나날이 수액이 줄어들고, 수명이 줄어들고
시간이 마르는 소리에 잠 못 이루는 밤
혼자일수록 더 잘 들리는 시간의 들숨과 날숨
시간 너머로 시간을 보내도
시간의 검은 문은 어김없이 열리겠지
소리 없이 신음하는 자가
더 아프겠지, 피가 마르겠지
잉크가 마르고 있다
써지지 않는 볼펜을 꾹 꾹 눌러 쓴다
잉크 없이 쓰는 글자가
더 선명하다, 지워지지 않는다
기억 너머로 기억을 보내도
기억은 어김없이 돌아온다, 툭 툭
피어나는 봄꽃을 막을 수 있나
호스피스 병동의 창밖에도
살구꽃 앵두꽃 수수꽃다리
피 흘리며 째깍거린다, 소리 없이
봄이 마르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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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2018-여름호 <신작시>에서
* 정채원/ 1996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슬픈 갈릴레이의 마을』『일교차로 만든 집』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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