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무음시계/ 정채원

검지 정숙자 2018. 6. 14. 03:29

 

 

    무음시계

 

    정채원

 

 

  겉모양 화려한데 잉크가 나오지 않는 볼펜들

  필통에서 한 자루 잡히는 대로 잡는다

  너는 깨어날 것이다, 죽지 않을 것이다

  글자가 써지면 너는 회생이다

  겨우내 얼어 있던 연못이 봄이면 꽃나무를 받아쓰듯이

 

  시계는 오늘도 소란하게 죽어간다

  두 개의 바늘을 제 살에 꽂고

  신음소리, 째깍째깍

  구름에 매달린 링거는 보이지 않아도

  나날이 수액이 줄어들고, 수명이 줄어들고

 

  시간이 마르는 소리에 잠 못 이루는 밤

  혼자일수록 더 잘 들리는 시간의 들숨과 날숨

  시간 너머로 시간을 보내도

  시간의 검은 문은 어김없이 열리겠지

  소리 없이 신음하는 자가

  더 아프겠지, 피가 마르겠지

 

  잉크가 마르고 있다

  써지지 않는 볼펜을 꾹 꾹 눌러 쓴다

  잉크 없이 쓰는 글자가

  더 선명하다, 지워지지 않는다

  기억 너머로 기억을 보내도

  기억은 어김없이 돌아온다, 툭 툭

  피어나는 봄꽃을 막을 수 있나

 

  호스피스 병동의 창밖에도

  살구꽃 앵두꽃 수수꽃다리

  피 흘리며 째깍거린다, 소리 없이

  봄이 마르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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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 2018-여름호 <신작시>에서

  * 정채원/ 1996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슬픈 갈릴레이의 마을』『일교차로 만든 집』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