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이위발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이긴 적이 없는 얼굴, 상대에게 의존하면 반드시 불행을 부른다는 직감을 믿는다. 우주가 이끈다는 자신감, 슬픈 꿈처럼 비가 내리고, 양파 같은 너의 맨발이 감자처럼 노란 발가락 사이를 열고, 반디의 무수한 불빛들이 이교도 무리처럼 은밀하게 명멸하고, 미확인된 비밀을 봐버린 것 같이, 뒤집힌 배처럼 흰 속을 드러내는 잎사귀들, 여름의 비릿한 냄새가 마당에 가득하고, 한낮의 연약한 그늘 속에서 누구를 기다리거나, 요람 속의 아기거나, 거름 내 나는 보잘것없는 풀꽃들이거나, 그 현기증은 서늘하고 어두운데, 햇볕은 공중에서 설탕이 녹아내리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상추로 싼 밥을 밀어 넣을 때 막막한 표정처럼, 함부로 뭉친 머리카락이 푹 젖고, 문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울타리, 달빛 아래 마주한 하얀 빨래에서 느끼는 전율, 밖을 나서기 전 내 몫이라고 손에 쥐어 주는 한 웅큼의 한숨, 그걸 한나절 시간 위에다 데굴데굴 굴리면서 기다렸다. 그 얼굴은 어둠을 빨아들여 언덕을 굴러다니는 눈뭉치로 부풀어, 달팽이가 되어 껍질 안으로 자꾸만 돌아가려고 하는 그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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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사』 2018. 3-4월호 <신작특집>에서
* 이위발/ 199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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