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시집 · 공검 & 굴원

서대선_레비아탄(Leviathan)에 맞서서(발췌)/ 굴원 :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8. 3. 23. 21:07

 

 

    굴원

 

    정숙자

 

 

  책상 모서리 가만히 들여다보다

  맑은 이름들 떠올려보다

  나 또한 더할 수 없이 맑아지는 순간이 오면

 

  눈물 중에서도 가장 맑은 눈물이 돈다

 

  슬픈 눈물

  억울한 눈물

  육체가 시킨 눈물…이 아닌

  깨끗하고 조용한 먼 곳의 눈물

  생애에 그런 눈물 몇 번이나 닿을 수 있나

  그토록 맑은 눈물 언제 다시 닦을 수 있나 

 

  이슬-눈, 새벽에 맺히는 이유 알 것도 같다. 어두운 골짜기 돌아보다가,

드높고 푸른 절벽 지켜보다가 하늘도 그만 깊이깊이 맑아지고 말았던 거

지. 제 안쪽 빗장도 모르는 사이 그 훤한 이슬-들 주르륵 쏟고 말았던 거

지.

 

  매일매일 매일 밤, 그리도 자주 맑아지는 바탕이라 하늘이었나? 어쩌다

한 번 잠잠한 저잣거리 이곳이 아닌 삼십삼천 사뿐히 질러온 바람.

는 아마도 먼- 먼- 어느 산 너머에서 그의 딸이었거나 누이였을지 몰라.

 

  그의 투강 전야에

  그의 마지막 입을 옷깃에

  ‘중취독성衆醉獨醒’ 담담히 수놓던 기억

  돌덩이도 묵묵히 입 맞춰 보냈던 기억

 

  몇 겁을 다시 태어나고 돌아와도 그 피는 그 피!

 

  이천 년이 이만 년을 포갠다한들

  그 뜻, 그 그늘이면 한 목숨 아낄 리 없지

   -전문,『미네르바』2017-겨울호

 

   레비아탄에 맞서서(발췌)_ 서대선/ 시인

  레비아탄(Leviathan)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바다 괴물이다. 레비아탄이란 ‘휘감다, 꼬다’라는 의미의 아랍어 라와(lwy)와 같은 히브리어에서 유래하였다. 레비아탄이란 용어는 구약성서의 시적인 단편에서 5번 등장한다. 욥기 3장 8절과 41장 1절, 시편 74장 14절과 104장 26절 그리고 이사야서 27장 1절에서 볼 수 있다. ‘똬리를 튼 뱀(crooked serpent)', 또는 ‘꿰찌르는 뱀(piercing serpent)’으로 불리기도 하는 레비아탄을 묘사하는 욥기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그 앞에서는 아무도 이길 가망이 없어 보기만 해도 뒤로 넘어진다. 건드리기만 하여도 사나워져 아무도 맞설 수가 없다. 누가 그와 맞서서 무사하겠느냐? 하늘 아래 그럴 사람이 없다’ -욥기 41:1

 

  “굴원屈原에게” 초회왕楚懷王은 레비아탄(Leviathan)이었다. 굴원이 주군主君으로 모시던 초나라 회왕은 탐욕과 어리석음의 비늘로 뒤덮인 채, 자신의 백성들과 충신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레비아탄이었다. 회왕이 재위하였던 당시 초나라는 6객국 중에서 강한 국가였지만, 회왕의 탐욕과 어리석음 때문에 진나라 승상 장의張依의 계책에 넘어갔다. 장의는 상어지방 600여리를 준다는 제안으로 회왕을 회유하여 제나라와의 결맹을 버리고 진나라와 결탁을 맺도록 유도하였다. 그러나 장의에게 속은 회왕은 분한 마음에 군대를 일으켜 전쟁을 일으켰지만, 오히려 땅만 빼앗기고 군대를 희생시키고 결맹을 맺었던 제나라와 원구가 되었던 것이다. 이때 나라 안에는 늑상이라는 간신배가 세력을 잡고, 충신이었던 굴원을 배척하였다. 탐욕스럽고 무지한 왕과 왕을 둘러싼 간신배들이 레비아탄이 되어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결국 충신인 굴원마저 죽음에 이르게 하였던 것이다.

 

  굴원은 젊어서부터 학식이 뛰어나 초나라 회왕의 신임을 받았고, 26세에 좌도의 중책을 맡아 내정과 외교에 활약하였다. 그러나 진나라 재상 장의와 내통하고 있던 간신들과 회왕이 총애하는 애첩의 집요한 방해로 제나라와 동맹을 맺어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굴원의 충언은 번번이 묵살당했다. 특히 법령입안法令立案 때 궁정의 정적들과 충돌하게 되자, 중상모략에 빠진 굴원은 관직을 박탈당하고 국왕 곁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결국 어리석고 탐욕스럽던 회왕은 막내아들 자란子蘭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회왕의 죽은 뒤 큰아들인 경량왕頃襄王이 즉위하고 아버지 회왕을 살해한 자란이 영윤令尹이란 재상자리에 오르게 되자, 굴원은 백성들과 함께 이를 강력하게 비난하다가 모함을 받아 양쯔강 이남의 소택지로 유배당하게 되었다. 레비아탄이었던 회왕의 자식들 또한 충신이었던 굴원에게는 대적할 수 없었던 레비아탄이었던 것이다.

 

  “이슬-눈, 새벽에 맺히는 이유 알 것도 같다. 어두운 골짜기 돌아보다

가, 드높고 푸른 절벽 지켜보다가 하늘도 그만 깊이깊이 맑아지고 말았

던 거지. 제 안쪽 빗장도 모르는 사이 그 훤한 이슬-들 주르륵 쏟고 말았

던 거지.”

 

  백성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던 레비아탄 왕조시대에서 왕에게 버림받은 충신 굴원은 레비아탄인 왕과 간신배의 무리에 도저히 맞설 수 없었던 불가능한 시대를 건넜던 것이다. 그가 왕에게 쫓겨나 자결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은 굴원이 지은 「어부사漁父辭」의 내용 중에서 어부와의 대화에 드러나 있다.

 

  <굴원이 추방당하여 강가를 돌아다니며 비탄에 잠겨 노래를 흥얼거리니 얼굴과 몰골이 수척하였다. 어부가 그를 보고 묻기를 ‘그대가 삼려대부 아니오? 왜 이 지경이 되었소?’

‘혼탁해진 이 세상에 나만이 깨끗하고, 모두가 술 취한 듯 비틀거리는 속에서 나만이 멀쩡한 정신을 가졌기에 쫓겨났소擧世皆濁我獨淸/衆人皆醉我獨醒/是以見放’라고 한탄하였다.

‘정치를 하는 이는 시세에 얽매이지 말고 세상과 함께 변화하며 살아야 하오. 온 세상이 다 혼탁해지거든 그 혼탁한 진흙을 휘저어 물결을 일으키고, 모두 술에 취해 있거든 그 술 찌꺼기와 술을 같이 마시어 함께 취해보지 않고, 무엇하러 자기생각에 골똘하여 고상한 체 하다가 쫓겨났단 말이오?’

‘머리를 감고 난 자는 갓에 끼인 먼지를 털어 쓰고, 몸을 씻은 자는 옷에 묻은 때를 씻어낸 뒤에 입는다지 않소? 어찌 깨끗이 씻은 머리와 몸으로 더럽혀진 물체를 접한단 말이오. 차라리 저 강물에 뛰어들어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내는 한이 있어도 깨끗한 이 몸을 더럽힐 수는 없소이다.’라고 굴원이 답하였다.>

 

  굴원이 유배를 당하여 10여 년 간을 방랑 생활로 보낼 무렵 자신이 그토록 우려하고 걱정한대로 진나라에 의해 조국인 초나라가 멸망당하게 되자, 굴원은 온몸에 돌을 매달고 미뤄강, 즉 멱라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만다.

 

   그의 투강 전야에

   그의 마지막 입을 옷깃에

   ‘중취독성衆醉獨醒’ 담담히 수놓던 기억

   돌덩이도 묵묵히 입 맞춰 보냈던 기억”

 

  정 시인의 시적 정신이 응축되어 있는 대목이다. 정 시인이 바라보는 오늘날의 세상도, 문단도 “굴원屈原”이 살았던 시대와 별로 달라지지 앟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문단 권력을 형성한 무리들이 레비아탄(Leviathan)처럼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지상의 그 누가 그와 겨루랴’는 듯 ‘생겨날 때부터 도무지 두려움을 모르는’ 모습이 되어 그 앞에 몸을 굽힌 나약한 문인들이 ‘그 앞에 쩔쩔 매니, 모든 거만한 것들의 왕이 여기에 있’듯이 행동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마도 먼- 먼- 어느 산 너머 에서 그의 딸이었거나 누이였을지 몰라."

 

   "몇 겁을 다시 태어나고 돌아와도 그 피는 그 피!"

 

  “이천 년이 이만 년을 포갠다한들/ 그 뜻, 그 그늘이면 한 목숨 아낄 리 없지”

 

  정 시인은 모두가 술에 취한 것처럼, 온 세상이 흐렸던 시간 속에 홀로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었던 굴원의 “중취독성衆醉獨醒”의 정신을 자신의 시적 정신의 자리에 놓는다. 정 시인은 굴원의 정신적 “딸”이거나 “누이”임을 자임하며, “그가 입을 마지막 옷깃에” 한 땀 한 땀 수놓았던 마음으로 시에 정진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다. 정 시인의 시적 정신은 오늘날 문단의 세태가 초회왕楚懷王의 시대처럼 무지와 탐욕과 패거리로 뭉쳐진 레비아탄(Leviathan)의 횡포 속에 있다고 느끼고 있다. 이런 문단세태 속에서 자신은 “굴원屈原”처럼 온 몸에 돌을 매달고 스스로 강 속으로 들어가 자결할망정, 레비아탄이 된 문단 권력의 발아래 엎드려 굴복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언하고 있다. 옷깃이 여며지고, 마음이 서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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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엠포엠』2018-봄호 <계간 시평 8>에서

  * 서대선/ 2009년 시집 『천 년 후에 읽고 싶은 편지』로 작품 활동 시작, 2013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 『레이스 짜는 여자』, 신구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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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대선 평론집『히말라야를 넘는 밤 새들』에 수록됨(포엠포엠 Books 011)/ 2019. 1. 10. <포엠포엠>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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