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잣불 축제/ 이수영

검지 정숙자 2011. 4. 21. 02:33

     잣불 축제


       이수영



  할머니와 아버지 엄마와 우리 형제들이 응접실에 둘러

  앉았습니다 티 테이블에 놓인 대바구니 안에는 잣들이

  그득합니다 막내가 제일 먼저 바구니 안에 손을 넣어 이

  것저것 골라 봅니다 내 차례가 왔습니다 할머니가 가르

  쳐 준대로 말갛고 투명하게 노르스름한 기름기가 도는,

  살이 많고 단단한 갸름하게 생긴 잣을 하나 집어 듭니다

  잣은 고깔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있는 아주 작은 구멍에

  다 바늘의 끝을 살며시 밀어 넣습니다 식고가 저마다 긴

  바늘에 꽂은 잣을 들고 성냥을 그어 조심스레 불을 붙입

  니다 그때쯤 미자씨는 방안의 전깃불을 모두 끕니다 미

  자씨는 지금부터 우리들의 심판관이 됩니다


  나는 깨끗하게 타오르는 식물성 기름의 냄새를 코로 음

  미하면서 오른손을 가슴에 올려놓고 눈을 감습니다 나

  의 소원은 할머니가 우리들 곁에 오래오래 있는 것입니

  다 나는 하느님께 떼를 쓰며 기도 합니다 엄하고 무섭지

  만 할머니는 우리 집의 지붕입니다 할머니는 우리들의

  하늘입니다 미자씨가 신이 나서 소리칩니다 성규 꼴등!

  조금 지나자 엄마의 잣불도 꺼졌습니다 다음은 영진이,

  아버지, 막내 그리고 나


  할머니의 잣불은 여전히 건강하게 타고 있습니다 할머

  니의 잣불은 한참을 더 갔습니다 미자씨는 할머니의 어

  깨를 주무르고 우리는 빈대떡을 젓가락으로 가르며 할

  머니의 덕담을 듣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물만두를 초간

  장에 찍어 입으로 가져갑니다 할머니의 얼굴은 사슴같

  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사슴상이라고 말합니다 할머니

  는 미자씨에게도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라고 축언을

  해줍니다


  오늘 밤은 일찍 자면 눈썹이 하얘지는 날입니다 집게손

  가락으로 눈꺼풀을 밀어 올리던 막내가 이내 잠에 떨어

  졌습니다 배도 부르고 정신의 양식이 충만한 밤 이 밤을

  건너면 지금 나이에 하나를 더해야 합니다 옷장 위에 놓

  인 색동저고리가 눈이 부셔 잠이 쉽게 올 것 같지 않습

  니다 잣불 축제는 끝이 났습니다   



  *『어머니께 말씀드리죠』에서/ 2011.4.5 <도서출판 황금알>발행

  * 이수영/서울 출생, 1993년『문예사조』신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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