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물의 해부학/ 이향란

검지 정숙자 2011. 4. 18. 20:08


    물의 해부학


     이향란



  수소와 산소가 만나 물이 된 이후

  물은 원래의 성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화학적 방법이 아니라면 물은

  영원히 물이다


  수소와 산소, 있지만 없다 없지만 있다

  손을 넣어 놀려도 이곳에서 저곳으로 쏟아 부어도

  물 위 그 어떤 무늬도 건져낼 수 없을 만큼

  적시며 흐르며 물은 버틴다

  맑은 힘, 그에 대해서는 끝내 말해주지 않는다


  중심에 스며들어, 찬란하게 박혀

  다른 이름으로 살아보고자 몸부림쳐 보는 날이 있다

  뒷걸음질쳐 다다른 숲에게

  물고기를 낚게 해준 그 강에게

  종일 세상을 말리다가 지는 태양에게


  그러나 건너가 박히고자 하는 것들을 통째 삼키며

  물렁해지기를, 숨어 흐를 수 있기를 바라지만

  쓸쓸하게도 나는 흠집이 나있거나 부서진 자리로

  매번 환원한다


  되돌아가지 않고 분리되지도 않는 단단한 물

  그 무엇으로도 해부되지 않는 고집이

  어느 날은 꽝꽝 얼어

  세상 모든 것을 철썩, 달라붙게 한다

   


 * 시집『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에서/ 2011년4월5일<도서출판 지혜>펴냄

  * 이향란/ 강원 양양 출생, 2002년 시집『안개』로 작품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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