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껑
이향란
뭔가가 이미 담겨져 있거나 담길만한 것에는 뚜껑이 있
다
주스 병을 따면 주스가
콜라병을 따면 어김없이 콜라가 나온다
밀봉됐던 것들이 냄새를 풍기며 탱탱하게 살아있다
땅의 뚜껑은 하늘이며
하늘의 뚜껑은 땅이다
우리는 땅과 하늘 사이에 담겨져
저마다의 생김새와 목소리와 냄새로
온전히 숙성되기를 바라며 살아간다
가끔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하던 것
혹시 우리의 생을 너무 무거운 뚜껑으로 유폐한 건 아
닌지,
뻥! 하고 한번쯤은
머리꼭지와 가슴의 뚜껑을 따버려야 했던 건 아닌지
아직껏 단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한 나를,
탄산가스만 부글부글 끓고 있는 나를
언제 한번 힘 있게 따볼까
내 안의 뜨거운 너는 속 시원히 솟구칠 수 있을까
* 시집『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에서/ 2011년4월5일<도서출판 지혜>펴냄
* 이향란/ 강원 양양 출생, 2002년 시집『안개』로 작품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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