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시마(詩魔)가 왔다/ 송재학

검지 정숙자 2017. 9. 27. 12:59

 

<권두시론>

 

 

    시마詩魔가 왔다

 

    송재학

 

 

  시업에 들어온 이래 평생 처음으로 시마詩魔에 몰렸다. 벌써 한 달 이상 시에 휘둘리고 있다. 종일 시가 사람을 괴롭힌다. 다른 일을 하자면 시가 귓속말을 건넨다. 다른 생각을 하면 시가 먼저 기침을 한다. 이규보가 말한 「구시마문효퇴지송궁문」이 떠오른다. "시마에 빠지면 세상과 사물을 현혹시켜 아름다움을 꾸미거나 평지풍파를 일으킨다. 또 신비를 염탐하고 천기를 누설시킨다. 게다가 사물의 이치를 밝혀냄으로써 하늘의 미움을 받아 사람의 생활을 각박하게 한다. 더욱이 삼라만상을 보는 대로 형상화한다. 국가나 사회의 일에 간여하여 상벌을 마음대로 한다. 마지막으로 사람의 형용을 초췌하게 하고 정신을 소모시킨다." 나에게 해당되는 부분은 세상과 사물을 현혹시켜 아름다움을 꾸미거나, 사람의 형용을 추췌하게 하고 정신을 소모시킨다, 까지다. 어째서 시마가 찾아왔는지 알 수 없다. 이규보는 대문장이기에 시마의 형상이 꿈에 찾아와서 해결을 했지만, 나는 불면에 시달리고 있다. 체력 때문에라도 빨리 이 현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기이한 인연도 시나브로 사라지겠지.

 

  퇴고를 마치고도 발표하지 못한, 아니 발표 안 한 시가 있다. 그 시들은 대체로 나를 통과하지 못했다. 물론 그중에서 운수 좋은 놈은 개작을 통해 지면을 얻기도 하지만, 아무리 수정을 해도 어림없는 경우가 많다. 내 시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마발표작을 가끔 살펴본다. 간혹 발표된 시일지라도 이 목록으로 이동하는 마뜩잖은 시편도 있다. 내 시의 문제점을 가장 잘 부각하는 경계이다. 관용구가 길어지는 경우, 형용사나 부사가 동원되어 미장센이 과도한 경우, 시적 논리성이 선명하지 않거나 결여된 경우 등의 이유들이 시치미를 떼고 있다. 물론 언어에 대한 쓸데없는 자의식도 있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표절하는 것보다 더 나쁜, 나 자신을 표절하는 경우도 있다. 같은 질문과 같은 이미지를 되풀이하는 자기 복제의 경우 끔찍스럽지 않은가.

 

  한 편의 놀라운 시는, 통점이 맺히는 시는, 다가올 때, 입말과 글말로 동시에, 전율의 육체로 온다. 시가 그 육체(그 육체는 사물의 육체이면서 내 몸이다)를 획득하는 경우이다. 내 육신의 한 지점을 바늘이 찌르는 것, 또는 가슴에 둔탁하고 막막한 통증이 번지는 것은 방금 경험한 시의 몸이 내 몸의 어떤 부분/기억과 겹치기 때문이다. 그것이 더듬더듬 말이나 글이 되려면 시간과 공간의 축복이 필요하다.

  좋은 시는 단순하게 끌림이지만, 매혹의 매커니즘 또는 매혹에 대한 시론을 기술하는 것은 간단치 않다. 문학에서 매혹은 때로 언어, 때로 오브제, 때로 서사의 힘에 의해 움직인다. 언어/오브제/서사는 그중 하나의 발화로도 다른 것들을 이끌어간다. 가령 언어가 기승을 부리면 오브제와 서사 또한 활력을 얻는다. 그때 시는 매혹의 육체를 통해서 거듭난다. 매혹의 범위부터 주관적이거나 감정적이다. 물론 우리는 간주관성 혹은 상호주관성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문학에서 정신을 사로잡는 강렬한 끌림이라는 매혹의 정의보다 우선 왜 문학이 매혹에의 창조물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사물에의 매혹이 그대로 문학의 매혹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이 짧은 글도  바로 그 정거장에서 잠시 멈춘다. 그 경우 사물이 바로 시의 질료로 작용한다. 시는 나에게 물컹 만져지는 물질의 덩어리이다.

 

  가끔 시골의 외가에 간다. 빗소리를 듣기 위해서이다. 날것이 주는 빗소리의 감상만큼 사람을 달래주는 게 있을까. 툇마루에 누워서 비를 바라보고 빗소리를 들으면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간다. 지나온 시간이 하나하나 회상이 되는 순간이다. 불을 끄고 가만히 누워 있으면 툇마루는 금방 빗물에 잠길 듯 아찔하다. 방으로 들어가서 잠을 청하면 빗소리 대신 짐승 소리가 끊임없다. 입을 갖다 대고 마구 비비는 사위가 시끄럽고 불안하다. 눈을 뜨면 그냥 빗소리이다. 다시 눈을 감으면 짐승은 물러갈 기색 없이 계속 떠들썩하다. 내가 마당으로 나오길 기다리는지 저가 안으로 들어오길 원하는지 요란하다. 다시 불을 켜고 사위를 살피면 바깥의 기척은 빗소리뿐이다. 눈을 감는다는 행위조차 이토록 신기하다. 귀와 눈은 어떤 점에서 다른가. 귀는 감각적이고 눈은 사실적인가. 귀는 근심이 많고 눈은 정이 많다. 아마 그 둘 사이 통로가 있을 것이다. 감각과 사실 사이의 통로를 오가며 폭우는 짐승을 탄생시킨다.

 

  폭풍 속의 숲은 거대한 힘과 거대한 방패와의 싸움이다. 폭풍 속에서 나뭇잎과 나뭇가지들은 폭풍이라는 운명을 필사적으로, 온몸으로 수용한다. 폭풍의 힘도 원래 자연의 섬세한 질서의 한가지라는 인식을 가진다면 불안한 나뭇잎/나뭇가지의 심리를 짐작할 수 있다. 태풍을 자연의 질서로 가까이 인정하면서도 그 힘에 대한 두려움이 앞장서는 태도야말로 자연을 접하는 원숙한 힘이다. '창조하기 위해서 파괴한다'라는 말처럼 폭풍은 지상을 휩쓸고 정화하기 위한 것들의 상징이다. 그 상징은 잔인하고 폭력성과 함께 생명에의 존중이라는 이율배반의 정서가 있다. 폭풍의 정체는 지구의 심장부에서 온 메신저의 역할이다. 당연히 그 메신저에는 생기, 쾌감, 정화 등으로 포장된 보석상자가 간직되어 있다.

 

  나무야말로 인간과 비슷한 영적 생물이다. 이동하지 못하고 언어가 없는 점은 약점이 아니라 나무라는 영적 존재에게 오히려 장점이다. 끊임없이 사고하고 자신을 되돌아본다는 점에서 나무는 인간에 가까운 대자적 존재이다. 누구라도 나무에게 정령을 부여한다면 가정 먼저 자크 브로스의 『나무의 신화』를 챙겨야 하지 않을까. 그 책에서 자크 브로스는 하늘과 대지를 연결하는 우주목으로서 나무를 신화적이고 인류학적인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나무에 기대는 것은 몽상에 기대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무의 힘은 바로 광대무변한 상상력의 나무, 우리의 일상을 벗어나서 우리의 본질을 자극하는 나무, 죽음이라는 가장 무거운 주제로 우리를 다시 좌선하게끔 하는 나무이다. 생멸의 과정을 통해서 우주목이라는 본래의 성질로 되돌아가려는 나무는 인간이 추구하는 관념과 너무나 닮았다. ▩

 

   -----------

  *『시인동네』2017-9월호 <권두시론> 전문

  * 송재학/ 1986년『세계의문학』으로 등단, 시집 『진흙얼굴』『검은색』등, 산문집『풍경의  비밀』『삶과 꿈의 길, 실크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