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
백무산
다락에서 먼지투성이 가방 하나 찾아내네
그러나 결빙된 내 기억은 도무지 풀리지 않네
먼지 털어낸 가방 속에 잘 개켜둔 옷 한 벌
마치 무덤 속 관 뚜껑을 열어본 듯
팔꿈치는 꽤 낡아 있고 유행이 많이 지났지만
내 옷이란 기억밖에 기억이 없다
이리 저리 뒤적여 보지만
언제였는지 어떻게 입은 옷이었는지
어느 한 때의 몸을 한껏 꾸미고
그 시절을 걸었을 것인데
두근거리던 시간 위를 걸었고
실의의 추운 밤길을 헤매기도 했을 것인데
땀과 눈물을 적시고 어떤 절정에 몸을 떨며
여자를 안아보기도 했을 것인데
아무리 떠올려 봐도 기억은 풀리지 않지만
분명한 한 때를 삶의 절정이던 한 시절을
나의 모든 것이었을 그 시간에
누추함을 감추고 한껏 품위를 입혔을 것인데
가방 속 지워진 그 시절을
몸은 사라지고 수의만 남은 관 속을 들여다보듯이
떠나보냈구나 이 옷을 입혀서 그 시절의 나를
모든 옷이 수의였다니
내가 나를 떠나보내면서 입혔던 수의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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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정신』2017-여름호 <신작시>에서
* 백무산/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84년 『민중시』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시집『만국의 노동자여』『폐허를 인양하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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