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늦었더라도
이은봉
밤이 늦었더라도 조금 더 걸어야 한다
여기서 돌아가면 안 된다 잠들면 안 된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가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내일을 만날 수 있다
기꺼이 어제의 낡은 것과 결별할 수 있다
새로운 것은 내일의 것이다
내일의 것은 금방 오늘의 것이 된다
오늘의 것은 한순간 낡아버린다
그래도 화순의 낡은 온천호텔 따위에
발이 묶여서는 안 된다 드넓은 벌판 위
가득가득 거친 눈보라가 치더라도
나주 금성의 객사 옆 '하얀집'에서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나눠 먹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걸음을 멈춰서는 안된다
더러는 뒤를 돌아봐도 좋다
뒤에도 아름다운 것은 있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 아름다울수록
앞을 향해 걸어 나가야 한다 더는
뒤로 돌아가면 안 된다 네 가족과 이웃들
위해서라도 눈보라 몰아치는 저 벌판 위,
그만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
저 환한 새벽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가야 한다.
-전문-
▶시적 변화와 새 길의 모색(발췌) _ 김완하
뒤를 돌아보는 것은 좋다고 한다. 그러나 뒤로 돌아가면 안 되고, 다만 "앞을 향해 걸어 나가야 한다"고 했다. 자연을 감싸 안는 생명력으로 "저 환한 새벽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가야 한다"고 하였다. 「밤이 늦었더라도」는 이은봉의 세계관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그동안 그는 철저히 현실에 대한 인식에 바탕을 두고 시세계를 펼쳐왔던 것이다. 예전에는 현실에 대한 강한 압박의 자세를 보여주었는데 이제 그것은 차분하게 가라앉고 점차 강한 생명의 울림으로 차오르는 것이다. 이 시에는 그의 미래에 대한 신뢰와 희망과 기대가 한껏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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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정신』2017-여름호 <이 계절의 시인> 에서
* 이은봉/ 1953년 충남 공주(현 세종시) 출생, 1984년『창작과비평』 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로 등단, 시집『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봄바람, 은여우』등, 현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
* 김완하/ 경기도 안성 출생, 1987년『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길은 마을에 닿는다』『허공이 키우는 나무』등, 시선집 『어둠만이 빛을 지킨다』, 한남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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