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계절 밖의 어느 계절/ 이신

검지 정숙자 2017. 5. 31. 16:10

 

 

    계절 밖의 어느 계절

 

    이신

 

 

  잎이 질 무렵,

  거리엔 따뜻한 꽃들이 먼저 일어났다

  질서 있게 피어나 노래하기 시작했다

  원칙과 신뢰의 가면이 벗겨지고

  허구의 얼음 왕좌가

  순식간에 녹아내리자

  체념을 동지로 삼던 언어들이

  비로소 깃을 턴다

 

  나는 가난한 자였으므로

  그 계절은 침묵조차 두려운 겨울이었고

  표현할 수 없는 몸짓은

  가슴에 피워 올린 노란 리본뿐이었으며

  나는 차가워져야 했으므로

  눈물 속, 많은 주검들에 대해

  더 뜨거울 수 없었다

 

  봄인 듯 겨울, 가을인 듯

  겨울이었던 그때

  밤거리를 서성이던 가로수들이

  연둣빛 깃발을 내걸었다

  두 손을 모으고 흐느끼던

  광장의 그림자들에게서는 향긋한

  얼굴이 자라난다

 

  새 눈과 새 입과 새 귀가

  곳곳에 피어나

  찬란하게 춤을 추는 지금은

  기어이, 기어이

 

  봄!

 

   --------------

  *『미네르바』2017-여름호 <신작시> 에서

  * 이신/ 2005년 『시와시학』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