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슬픔의 맛/ 손현숙

검지 정숙자 2011. 3. 8. 01:45

    슬픔의 맛


      손현숙

                

                                      -안다는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이며,

                                       안다는 것은 기억하지 않고도 아는 것이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중에서

 


   오스만제국의 세밀 화가들은 신이 보았던 그대로 세상을 그리려고

 했다 하루도 쉬지 않고 50년 동안 그림만 그렸기 때문에 대부분은

장님이 되고 말았다 반복해서 그리던 세상을 손으로 외워서야 신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한다


   언제부턴가 내 눈도 멀어 너를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나라고 하는 너’는 나를

끌고 일곱 하늘과 일곱 땅을 통과한다. 내 발과 네 발이 겹쳐 나는

언제나 혼자다. 보지 않고도 안다는 것,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슬픔의

맛 너의 시간은 나의 시간을 이해할 수 없으리

   생각 속에서만 환생하는 꽃을 보며 내 몸에 벨벳 같은 어둠이

찾아든다 너보다 더 너 같았던 나, 이제야 너를 환히 본다 그러나

너는 나를 기억하지 말기를…



  *시집『손』에서/ 2011.2.21 <문학세계사> 펴냄

  *손현숙/ 서울 출생, 1999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스트 유치/ 조원효  (0) 2011.03.16
눈망울/ 조원효  (0) 2011.03.16
일상이 이긴다/ 손현숙  (0) 2011.03.08
북어/ 김문억  (0) 2011.03.06
질경이의 노래/ 김문억  (0) 2011.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