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이긴다
손현숙
외식하고 집에 와서 찬 물김치로 입가심했다 거북했던 옷 활활 벗듯 그제야 속이 좀 편안하다 다니던 길로만 다니고 먹던 음식만 먹고 입던 옷을 입어야 마음 놓이는,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도 돌아갔다 더듬이를 겨우 내밀어 불륜 같은 사랑을 하고 제각각 집으로 돌아가는 달팽이처럼 시치미 딱 잡아떼고 갔다 가서 된장국에 밥 말아 목구멍으로 술술 잘 넘겼을 거다 어쩌다 구름 위로 그가 지나가는 것 같다 가끔씩 내가 하늘로 고개 꺾는 이유이기도 하다
통점을 알 수 없는 환부가 욱신거린다
꿈속에서도 집요하게 붙드는 그 무엇, 일상은 한시도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쓴맛이 단맛을 이기듯이 그는 순식간에 나를 벗어 버렸다 매혹은 그저 한 끼 식사라는 것, 그에게서 배웠다 억겁처럼 긴 찰나가 지나갔다 배가 고팠다
* 시집『손』에서/ 2011.2.21 <문학세계사> 펴냄
* 손현숙/ 서울 출생, 1999년『현대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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