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고봉준_무한한 변이들(발췌)/ 미학 : 김언

검지 정숙자 2017. 4. 15. 21:40

 

 

    미학

 

    김언

 

 

  나는 혼자서는 쉽게 놀지 않는다. 어딘가에 타인을 만들고

있다.

  고요하고 거침없이 적을 만든다. 그를 사랑해도  좋다.

  그와 무엇으로 대화하겠는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위험에 대해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다.

 

  나는 혼자서는 쉽게 취하지 않는다.

  어딘가에 항상 손님을 만든다. 분노를 만들기 위해

  그를 쫓아가도 좋다. 꼭 그만큼의 간격으로

 

  누군가를 방문하고 멱살을 잡는다.

  나는 혼자서는 쉽게 풀지 않는다. 어딘가에 꼭 오해를 만

들고 있다.

     -전문,『모두가 움직인다』, (문학과지성사, 2013)

 

 

  무한한 변이들_ 김언의 시 세계와 '언어'(발췌)_ 고봉준

 「미학」에서 화자 '나'는 자신의 시작(詩作) 행위를 '타인'을 만드는 것이라고 소개한다. 알다시피 서구에서 예술(art)이라는 말은 라틴어 '아르스(ars)'에서 유래했는데, 그것은 고대 그리스의 '테크네(techne)'에서 온 것이다. '테크네'란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뜻하는데, 그리스인들은 이 테크네를 활용해 물건을 만드는 것을 '포이에시스(poiesic)'라고 명명했다. 이것이 라틴어로 '포에시스(poesis)'가 되었고, 영어권에서는 '포이트리(poetry)'가 되었다. 화자는 이 포이에시스를 한편으로는 유희(遊戱), 즉 노는 것으로, 또 한편으로는 제작, 즉 만드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흥미로은 것은 이 '유희'와 '제작'이 사물-대상이 아니라 '타인'을 만드는 것이라는 인식이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이렇게 만들어진 '타인'이 텍스트에서 '나'로 변신하여 등장하는 것이 시의 특징이니, 우리는 "나는 혼자서는 쉽게 놀지 않는다"라는 문장에 등장하는 '나'조차도 '타인'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유희/제작이 '타인'을 만드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타인'이 또 다른 발화점인 '나'가 되는 게임이야말로 시의 고유한 장르적 특징인지도 모른다./ 이 논리를 조금 더 밀고 나가보자. 이것은 만드는 '나'와 만들어진 '나'가 기표적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시가 일인칭의 고백이라는 장르적 통념을 위협한다. 이 '나'의 상이한 존재감을 시인은 '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그것은 잠재성의 차원에서 이질적임을 가리킨다. 즉 만든 '나'에게 만들어진 '나'는 '적'일 수도 있고 '사랑'의 대상일 수도 있으니, 그 어느 경우에라도 복수의 '나' 사이에는 "적당한 간격"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간격이 존재할 경우에만 유희/제작의 결과물을 대상으로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수 있다. 물론 '만들어진 나'를 '적'이 아니라 '손님'이라고 칭해도, 그리하여 그에게 '분노'의 감정을 느끼고, 심지어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도 사태가 바뀌지는 않는다. 시인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 즉 시(詩)가 '오해'될 운명임을 알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스로의 외부에 대상을 생산해 내는 포이에시스, 즉 장인이나 예술가의 활동을 스스로의 내부에 고유의 목적을 지니는 실천, 이를테면 정치적 활동과 대치시켰다"(아감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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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파란』2017-봄호 <poet & critic> 에서

  * 김언/ 1998년 『시와 사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 시집 『숨 쉬는 무덤』『모두가 움직인다』외

 * 고봉준/ 2000년 《서울신문》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 평론집『반대자의 윤리』『비인칭적인 것』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