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김언_한 손에는 언어를...(발췌)/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 정재학

검지 정숙자 2017. 4. 9. 23:31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정재학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비가 오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

로 밥을 지으신다 날도 어두워지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

으신다 하늘이 죽어서 조금씩 가루가 떨어지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나는 아직 내 이름조차 제대로 짓지 못했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피뢰침 위에는 헐렁한 살 껍데기가 걸려 있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암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

을 지으신다 맥박이 미친 듯이 뛰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손

톱이 빠지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누군가 나의 성

기를 잘라버렸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목에는 칼이 꽂혀서

안 빠지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그 칼이 내장을 드러냈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펄떡거리는 심장을 도려냈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담벼락의 비가 마르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

로 밥을 지으신다

  -전문-

 

 

  한 손에는 언어를, 한 손에는 음악을, 무엇보다 시를!(발췌)_ 김언

  '-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가 반복되는 이 시는 당시 일군의 시인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던 환상시 안에서도 분명한 변별점을 보여준다. 단순히 환상적인 장면의 나열에만 그치는 거개의 환상시와 달리 이 시는 주술에 가까운 말의 힘으로 환상성을 획득하고 있다. 동원되는 환상의 내용물은 가상천외한 데 반해, 그것을 담아내는 방식은 애니메이션의 콘티처럼 단조로운 문체에 빠져들기 쉬운 환상시의 난맥을 보란 듯이 극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는 환상이기 이전에, 영화나 만화이기 이전에, 무엇보다 '말'이라는 사실을 주문처럼 반복되는 구절에 담아내고 있는 저 시의 매력적인 어투는 이후에 등장하는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자주 응용되거나 활용된다. 멀리 갈 것 없이 나 역시도 첫 시집에 들어 있는 시 한 편은 저 어투에서 영향 받았다고 고백해야 온당할 것 같다./ 환상시의 새로운 문법을 제시하는 동시에 환상시라는 좁은 카테고리를 훌쩍 뛰어넘는 정재학의 시적 성취는 그러나 2005년을 기점으로 일어난 소위 미래파 담론으로 인해 상당 부분 그늘에 가려졌던 것이 사실이다. 족보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것처럼 착시를 일으키는 미래파 시의 특징적인 면모 중 일부는 정재학의 선구적인 시적 성취와 떼어놓고 거론할 수 없는 것인데로, 많은 비평들의 논의에서 그 점이 간과되거나 누락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미래파 담론이 본격화되기 전에 나왔던 그의 첫 시집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민음사, 2004) 도 그 성과를 지속적으로 소급해서 들려준 비평이 드물었다./ 돌이켜 보면 2004년 그가 첫 시집을 낼 무렵은 젊은 시인들의 시집 출간이 '정말로' 쉽지 않은 시기였다. 정재학 시인도 마찬가지 시절을 지났다. 창간사에 시 전문이 인용되기도 한 『포에지』의 발행처인 나남출판사에서 첫 시집을 내기로 되어 있었으나, 출판사가 잡지 발행과 시인선 발간을 한꺼번에 중단함에 따라 몇 년간 속절없이 출간을 미루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등단 8년 만에 나온 첫 시집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는 이후에 전개되는 미래파 담론의 핵심적인 시들과 여러모로 비교가 되고 대비가 되는 시집이다.

 

    -----------------

  *『현대시』2017-3월호 <커버스토리정재학> 에서

  * 김언/ 시인, 1998년 『시와사상』으로 등단, 시집 『숨 쉬는 무덤』『모두가 움직인다』외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가 폭력을 휘두르다니/ 이승하  (0) 2017.04.10
이슬 프로젝트- 21/ 정숙자  (0) 2017.04.10
초원의 꿈/ 정재영  (0) 2017.04.09
수레/ 김지헌  (0) 2017.04.09
그래도/ 김지윤  (0) 2017.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