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사라진 세배 문화와 보름밥 먹기/ 김병학

검지 정숙자 2017. 1. 9. 03:01

 

 

    사라진 세배와 보름밥 먹기

 

    김병학(전 김제 문화원장, 전 전국문화원연합회 전북지회장)

 

 

  우리가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택한 것은 1894년 갑오경장 때 개화당의 김홍집 내각에 의한 하나의 혁명이었다. 1895년 음력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건양' 1월 1일이라고 고종황제의 칙명으로 선언했다. 세력(歲歷)을 태양력으로 바꾸고 나라에 쓰는 연호도 양력을 세운다는 뜻의 '건양(建陽)'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이었다. 중국은 서기 1912년 양력으로 바꿔 1월 1일을 개국일로 삼았고, 일본은 1872년 태양력을 사용한 이후 양력 1월 1일을 국민의 축일로 삼았다.

  태양력을 사용하게 된 이후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으며 우리는 많은 압박을 받았다. 우리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했고 우리 성과 이름까지 빼앗고 민족문화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우리의 명절 또한 수난을 받아 무조건적인 양력설을 강요하였다. 그렇지만 다수의 국민들은 양력설보다는 심정적으로 음력설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다보니 양력설과 음력설을 이중으로 지내는 사람이 많이 생겨나게 되기도 했다. 일제는 우리 고유의 설날도 놀지 말고 가마니를 짜라고 강요했다. 면서기들을 시켜 설날 가마니를 실제로 짜는가를 확인하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해방이 되고 정부는 1965년부터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공휴일을 만들었다. 그 뒤, '민속의 날'로 정했던 구정을 1989년부터 다시 '설날'로 개명하는 동시에 3일 간의 연휴로 정했다.

  설은 묵은해를 떨쳐버리고 새로 맞이하는 새해의 첫머리며 첫날이다. 설이라는 말은 '설다', '낯설다' 등의 '설'이라는 어근에서 나온 듯도 하다. 설의 설다움은 그것이 '처음 날', '비롯함의 날'이라는 데 있다. 그러기에 설은 새로 태어남과 다르지 않다.

 

  새배는 정월 초하룻날에 하는 새해의 첫 인사이다. 「동국세시기」에 '남녀 어린이들이 새 옷을 입는 것을 설빔이라 하고, 집안 어른들을 찾아뵙는 것을 세배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배는 좋은 한 해가 되기를 비는 중요한 예절인 만큼 세배를 하거나 받을 때는 정중함과 함께 격식도 갖추어야 한다.

  세배는 차례가 끝난 뒤 자기 집안에서 집안 어른들에게 차례로 절하고 새해 인사를 드린 뒤, 다음으로는 친지와 동네 웃어른들을 찾아뵙고 세배를 드리게 된다. 세배를 받은 사람은 과자나 세뱃돈을 주며 세배한 사람이 어른일 경우는 미리 준비해 놓은 음식을 대접한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때때옷을 입고 친구들을 불러 모아 같이 세배를 다녔다. 세배를 하면 눈깔사탕 두 개씩 주든지 손가락과자 두세 개씩을 주었다. 그러면 그 과자를 받아서 새로 만들어 입은 설빔 옷 조끼 호주머니에 넣고 다른 집으로 몰려간다. 얼마쯤 다니다 보면 호주머니가 꽉 차서 더 넣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면 빠른 걸음걸이로 집에 가서 호주머니에 넣은 과자를 다 내놓고 또다시 세배를 다녔다. 그때는 어른들을 찾아 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세배를 다녔지만 과자를 주니까 과자 받는 재미로 한 집도 빼놓지 않고 다녔던 것 같다. 그런데 근자에는 어린 소년들의 세배 문화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어른을 존경하고 이웃과 정을 나누는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서라도 세배 문화를 다시 장려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설을 지내고 보름이 지나면 정월대보름이 찾아온다. 음력으로 1월 15일은 정월 대보름이라 하며 한자로는 상원(上元)이라고 한다. 이날은 우리나라 세시풍속에서 설날만큼 비중이 크다. 정월대보름은 한 해의 복과 풍년을 기원하며 액을 떨치기 위해 1년 중 어느 때보다도 다양한 민속놀이와 세시풍속을 즐기는 명절이었다.

  보름날 밤에는 뒷동산에 올라가 달맞이하는 날로 이때 달을 먼저 본 사람이 신수가 좋다고 하고 농부들은 이 달의 형상을 보고 그 해에 풍년이 들 것인가 흉년이 될 것인가를 점치기도 했다. 대보름날 달빛이 희면 비가 많고 붉으면 한발이 있으며 달빛이 진하면 풍년이 들고 달빛이 흐리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또 달이 남으로 치우치면 해변이 풍년이 들 징조이고 북으로 치우치면 산촌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이날은 추운 겨울에 횃불을 들고 동산에 올라가 먼저 달을 보는 것이 길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일부러 높은 데에 오르기도 하였다. 달이 오르려고 동쪽 하늘이 붉어지면 횃불을 땅에 꽂고 손을 합장하여 1년 신수를 기원했다. 농부는 풍년 들기를 빌고 총각은 장가가기를 빌고 처녀는 시집가기를 빌고 유생도령은 과거에 급제하기를 빌었다.

 

  달집태우기는 대보름날 달이 떠오르는 방향의 마을 동산에 올라 짚을 엮어 달집을 만들어 태우는 놀이다. 소원을 적은 종이와 청솔가지를 짚으로 엮은 달집에 넣어 불을 붙인 뒤 마을 사람들이 그 주위를 돌며 그해 평안을 빈다. 달집의 둘레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묵은 저고리 동정이나 깃을 뜯어서 불붙은 달집에 던져 넣으면서 액막이를 빈다. 이 같은 달집태우기는 액운을 물리치려는 민간 신앙적 풍속의 하나다.

  다리 밟기는 답교(踏橋)놀이라고도 한다. 이 날 열두 다리를 건너면 1년 열두 달의 액(厄)을 막는다고 하여 그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이 풍속은 고려 때 시작하여 성행하였는데, 혼잡했기 때문에 여자들은 16일 밤에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양반들이 서민들이 들끓는 것을 싫어하여 14일 밤에 행하여 속칭 이 날을 '양반 다리 밟기'라 하였다.

  연날리기도 오랜 옛날부터 전승되어 되어 오는 민속놀이의 하나로서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즐길 수 있는 놀이다. 연날리기는 주로 음력 정초부터 시작하여 보름날까지 계속하다가 보름날 오후에는 연에 액(厄), 혹은 송액(送厄), 영복(迎福) 등의 글자를 써서 얼레가 다 풀리도록 날려 올린 다음 실을 끊어버린다. 「삼국사기」, 「동국세시기」, 「열양세시기」등의 문헌을 보면 연에 관한 전설과 설화가 많이 있다.

  부럼 깨기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밤, 호도, 잣 등을 깨물어 마당이나 지붕에 "부럼 나가"하고 던지는 풍속이다. 대개 자기 나이 수대로 깨물기도 하나 노인들은 이가 단단히 못하여 몇 개만 깨문다.

 

  귀밝이술은 정월 대보름날 아침 식전에 귀가 밝아지라고 마시는 술이다. 귀밝이술은 데우지 않고 차게 마시는 것이 특징이다.

  더위 팔기는 자신의 더위 타는 병을 남에게 넘겨주려는 세시풍속의 하나이다. 이는 「동국세시기」에도 나타나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더위를 파는데 될 수 있으면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서 이웃 친구를 찾아가 이름을 불러야 한다. 친구에게 이름을 불린 아이가 무심코 대답을 하면 "내 더위 사라"고 외친다. 이렇게 하면 이름을 부른 사람은 더위를 팔게 되고, 대답을 한 사람은 친구의 더위를 사게 된다. 그러나 친구가 더위를 팔기 위하여 이름을 부른 것을 이미 알았을 때에는 대답 대신 "내 더위 사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면 더위를 팔던 친구가 오히려 더위를 사게 된다.

 

  일부 지방에서는 정월 대보름날 아침 일찍이 소에게 밥과 나물을 차려 주는 풍습이 있다. 찬밥과 나물을 상이나 키에 담아서 준다. 이것을 <소 밥 주기>라고 한다. 소는 농사에 큰 힘이 되고 값이 비싸 큰 재산이기 때문에 농가에서는 소를 위하고 위로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소의 해에 되새겨 볼만한 일이다. 

  대보름 백집밥(百家飯) 먹기란 정월 대보름날 아이들이 그 해의 운수나 건강을 위해서 여러 집의 오곡밥을 얻어먹는 풍습이다. 보름날 아침이면 아이들이 조리나 작은 소쿠리를 들고 이웃집을 돌아다니며 걸식하여 오곡밥을 한 숟갈씩 얻는다. 타성의 세 집 밥을 먹어야 그 해의 운이 좋다고 하기도 하고 백 집의 밥을 먹어야 좋다고 하는 지방도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또래 친구들과 같이 다니면서 밥을 얻었는데 몇 집 안 가서 한바가지가 되면 집에 가서 다른 그릇에 담아놓고 또 안 다닌 집을 다니면서 밥을 얻던 생각이 난다.

 

  오곡밥은 찹쌀, 붉은 팥, 찰수수, 밤, 기장쌀, 등을 넣어서 시루에다 밥을 했다. 정월대보름날에는 약식을 먹어야 좋다고 한다. 이날 약식 먹는 유래는 신라 21대 소지왕 때의 고사에 의거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근자에는 아이들이 조리나 작은 소쿠리를 들고 이웃집을 돌아다니며 오곡밥을 걸식하는 풍습은 찾아볼 수 없다. 이웃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한데 다른 성씨의 세 집 밥을 먹는 풍습을 살린다면 이웃과의 관계가 좋아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정월대보름에는 이와 같이 좋은 세시 풍속이 많은데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보름이 되어도 쥐불놀이를 하는 아이들이나 보름 밥을 얻으러 다니는 아이들을 구경하기 힘들게 되었다. 다른 나라의 문화가 유입되고 세상살이가 각박해지다 보니 이웃과 어울려 한 박자 쉬어가는 풍속이 사라지는 실정이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부럼 깨기나 오곡밥을 지어 먹는 풍습이 그것이다. 김제에서는 지금도 보름날 밤에 입석 줄다리기 행사를 한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행사는 아주 먼 옛날부터 행해졌다고 하는데, 다른 곳의 줄다리기와 다른 것은, 다른 곳은 마을 대 마을의 대결이지만 이곳 줄다리기는 남자와 여자의 대결이고, 여자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해서 해마다 여자편이 이긴다. 입석 줄다리기는 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각 자치 단체에서 사라져 가는 민속을 발굴하고 보존해야 하는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민속을 보존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사라져버린 민속을 재창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월대보름을 음양설로 따지자면 달에는 여자의 의미와 땅의 의미와 생산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러기에 대보름의 뜻은 한마디로 말하여 풍요의 원점이 된다. 설에서 대보름까지의 놀이와 전통이 사라져가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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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필집『내 고향 김제』에서, 2016.12.30. <인문사> 펴냄

   * 김병학/ 1930년 김제 출생, 김제 문화원장 역임, 전국문화원연합회 전북지회장 역임 외 다수. 대한민국 화관문화 훈장 수상 외 다수, 저서 『우리 고장의 옛 지명』『김제 명현 자료집』외 다수, 수필집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고향(故鄕) 김제』『새만금의 본향 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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