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음기
-일제 하 어느 무명 가수 생애를 떠올리며-
조오현
언제부터인가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어쩌다 늙은이들만 오랜만이라고 만져보고 간다
내가 본
지금 나의 면목은
녹슨 축음기
산에서나 들에서나 그 어디에서나
-소리 듣고-
별이 뜨는 밤이거나 뜨지 않는 밤이거나
-소리 듣고-
날 닮은 나뭇가지들 다 휘어지고 다 부러졌지
이제 내 소리 듣고 흉내 낼 새도 없고
이제 내 소리 듣고 맛들 열매도 없다
이제는 내가 나를 멀리 내다버릴 수밖에
-전문-
▶ 이렇게 읽었다 _ 이찬(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지금 나의 면목은/ 녹슨 축음기"라는 문양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축음기」-일제 하 어느 무명 가수 생애를 떠올리며-는 현대문명의 산물인 "축음기"에 시인 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빗대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의 시편들과 다른 감각의 울림을 선사한다. 부제로 붙여진 "일제 하 어느 무명 가수 생애를 떠올리며" 역시 그 아득한 시간의 깊이를 건너 스님의 '실존의 역사'에 지워지지 않을 흔적으로 남아있을 유년의 한 장면을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현재적 질감으로 뒤바꿔놓는다. 그렇다. "언제부터인가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어쩌다 늙은이들만 오랜만이라고 만져보고 간다"라는 도입부는 "축음기" 자체에 깃든 그 오래된 시간의 질감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뒷면에 소리 없이 스며든 시인의 '실존의 역사'를 암시한다. 그것은 2연에 나타난 "산에서나 들에서나 그 어디에서나/ -소리 듣고-/ 별이 뜨는 밤이거나 뜨지 않는 밤이거나/ -소리 듣고-"라는 구절과 함께 울려나면서 스님의 묵묵히 걸어왔을 수도자의 생애와 그 감각적 비의를 단 몇 줄로 압축한다.
스님이 일제 강점기인 1932년에 출생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저 "축음기"는 그가 "출가"의 삶을 시작하기 그 이전, 그의 유년을 사로잡았을 어떤 감각적 충격의 장면에서 빚어진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특히 이 시편의 부제, "일제 하 어느 무명 가수 생애를 떠올리며"라는 말이 거느린 시간의 깊이와 그 아득한 질감에 의해 뒷받침되면서 스님의 실존의 역사를 다시 깊게 상상하도록 강제한다. 다시 말해 그의 실존적 역사 내부에 아로새겨졌을 감각의 울림을 말없이 펼쳐낸다. 허나, 시인은 제 자신의 한계를 정직하게 바라본다. 마지막 대목에 나타난 "이제 내 소리 듣고 흉내 낼 새도 없고/ 이제 내 소리 듣고 맛들 열매도 없다/ 이제는 내가 나를 멀리 내다 버릴 수밖에"라는 문양은 지금 이 자리에서 시인 자신이 절실하게 체감하는 무능력과 그 한계 상황을 진솔하게 드러낸다.
'우선 그 형식에 있어 종교는 찬송하고 기도하고 귀의하지만 문학은 사색하고 상상하고 창조(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에 있어 종교는 이미 발견되고 체현된 신에 대하여 복종하고 신앙하고 귀의하지만 문학에 있어서는 각자가 자기 자신 속에 혹은 자기 자신을 통하여 영원히 새로운 신을 찾고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가 자기 자신 속에 혹은 자기 자신들을 통하여 새로운 신의 모습을 찾고 구한다는 사실은 문학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김동리,「문학하는 것에 대한 사고(私考)」,『문학과 인간』, 청춘사, 1952, 101쪽.)라는 말처럼, '시'와 '문학'은 '이미 발견되고 체현된 신'의 세계, 어떤 '완성된 이념 체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저기 저 가닿을 수 없는 곳에 나타나는 매 순간마다 다시 나타나는 '새로운 신'을 찾는 행위이기에, 그야말로 '영원한 미완성'의 추구일 수밖에 없다. 「축음기」-일제 하 어느 무명 가수 생애를 떠올리며-의 마지막 대목이 종교적 충동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학'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에서는 여전히 늘 도달할 수 없는 '새로운 신', 곧 '영원한 미완성'의 세계를 찾아가려는 자의 힘과 긴장이 뿜어져 나오기에. ▩
※ 출처:『시조시학』,「말할 수 없는 '진리'와 말할 수밖에 없는 '설법' 사이에서」발췌, 2013_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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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성훈 편저_설악 무산, 한글 禪詩『이 · 렇 · 게 · 읽 · 었 · 다』/ 2015.3.12. 초판, 2016.5.10. 증보판 <도서출판 반디>발행
* 조오현(필명)/ 법명:무산(霧山), 법호:설악(雪嶽), 자호: 만악(萬嶽), 대충(大蟲)
* 편저자 권성훈/ 한신대학교 종교학과, 경기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한국현대시에 나타난 치유성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고려대학교 국문과에서 「한국 종교시에 나타난 치유성 연구」로 박사후과정을 수료했다. 계간 『작가세계』신인상 수상, 시집 『유씨 목공소』, 저서『시치료의 이론과 실제』『폭력적 타자와 분열하는 주체들』『정신분석 시인의 얼굴』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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