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순간 풍경/ 황상순

검지 정숙자 2016. 12. 15. 02:44

 

 

    순간 풍경

 

    황상순

 

 

  돌개바람에 나뭇잎 하나 손을 놓치는 순간

  검정염소의 긴 혀가 싹둑 민들레 줄기를 베어 물었다

  떨어진 잎은 간발의 차이로 몸을 보존했다

  고개를 들어 바람의 냄새를 맡는 바로 그 순간

  꽈르릉 들판 가득 천둥이 쳤다

  순간, 염소의 저 뿔 때문인 줄 알았다

  호두알처럼 굵은 빗방울이 머리를 때리는 순간에도

  염소는 되새김질을 멈추지 않았다

 

  소나기 멎고

  은사시나무 푸른 이파리가 맑은 빗물을 길게 떨어뜨릴 때

  순간, 빛이 눈부셨다

  반 평 넓어진 웅덩이에

  물잠자리가 꼬리를 대는 그 순간에

  염소가 되새김질하던 해를 꼴까닥 삼켰다

  곧 닥쳐올 칠흑 우주, 저 검정염소는

  뿔도 꼬리도 다 사라진 몸을 어찌할 것인가

  매애애 한 점 울음으로만 허공에 남을 것인가

 

  번갯불에 비친 듯 짧은

  찰나의 존재들을 다 어찌할 것인가

 

  블랙홀처럼 깊은 두 눈에 노을이 번지고

  염소를 몰고 갈 아이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때

  여우비에 목욕재계한 여름풍경의 조각조각들이

  지구의 저녁 한때를 향해

  머리 조아리며 경배하는 엄숙한 순간

  염소가 끊임없이 순간 순간들을 되새김질하는 이 순간.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의 근원을 흐르는 서정의 샘물이 사람들 세상을 흘러 흘러 우주의 비의와 만나는 순간이다. 시인이 만들어낸 동화적 상상력에, 장자 식으로 말하자면 사람살이쯤은 하찮아지는 우주 자연의 비의가 작품에 저절로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마치 공자가 하늘과 땅 사이의 사람을 찾아내자 노자가 그 사람들을 둘러싼 자연을 조명하고, 그 조명 속에 장자가 우주를 보여주는 화엄세계가 열리는 이치와같다 할 것이다. (박제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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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오래된 약속』에서/ 2016.12.1. <문학아카데미>펴냄

  * 황상순/ 강원도 평창 봉평 출생, 1999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어름치 사랑』『농담』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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