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1912-1996, 84세)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폭폭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폭폭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않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폭폭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폭폭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폭폭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전문-
▶ 천희(千姬)는 살아있다/ 백석이 가만히 좋아했던 여인(발췌)_ 정철훈
통영의 천희는 함흥에서 나타샤로 변주되고 있다. '나타샤'를 두고 항간엔 백석과 동거했던 자야(김영한)라느니 통영의 박경련이라느니 이설(異說)이 무성하다. 또 백석이 이 시를 써서 우편으로 부친 최정희와 모윤숙이 거론되기도 한다. 이렇듯 세간에는 말이 많다. 하지만 문맥으로 보면 이 시는 유행가풍의 사랑법을 일거에 격파한 드높은 격조가 있다. '나타샤'는 백석이 사랑한 모든 연인들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호칭에 다름 아닐 것이다. 시「통영」에 등장하는 '천희(千姬)'처럼 '나타샤'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백석의 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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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2016-10월호 <문학사의 풍경>에서
* 정철훈/ 1997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빼째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빛나는 단도』외 다수의 시집과 장편소설, 산문집이 있음. 시인/ 소설가/ 문학저널리스트/ 국민일보 논설위원 · 문화부장 · 문학전문기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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