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驛)
한성기(韓性淇 1923-1984, 61세)
푸른 불 시그낼이 꿈처럼 어리는
거기 조그마한 역(驛)이 있다
빈 대합실(待合室)에는
의지할 의자(倚子) 하나 없고
이따금
급행열차(急行列車)가 어지럽게 경적(警笛)을 울리며
지나간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아득한 선로(線路) 위에
없는 듯 있는 듯
거기 조그마한 역(驛)처럼 내가 있다
-전문, 시집『산山』에서
▶ 외로움의 눈물로 익힌 시의 보석_한성기 시인의 시세계(발췌) : 김석환
시적 배경인 '역'의 짙은 어둠 속에서 푸른 불을 밝히고 있는 '시그낼'은 떠나버린 누군가 올지도 몰라 밤을 새우며 기다리고 있는 시인의 내면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떠날 이도 돌아올 이도 없어 텅 빈 대합실에는 시린 밤바람만 새어들 뿐 외로움에 지친 몸을 기댈 '의자 하나 없'다. 완행열차나 어쩌다가 쉬어가는 외진 역을 스쳐 지나는 급행열차의 긴 경적이 외로운 마음을 더욱 흔들다 간다. 때때로 내리는 비와 눈은 결핍과 고독을 견디며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인의 아픈 마음을 대신 보여 주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이처럼 텅 비고 소외되어 있는 '조그마한 역'은 끝 연에서 곧 나의 실존에 비유된다. 시인은 극한의 외로움과 슬픔을 억제하고 역의 풍경을 묘사하여 여러 이미지로써 객관화하여 미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런데 결핍과 소외와 기다림을 대신하는 역의 풍경은 시인만이 아니라 열린 존재로서 세계 안에 던져진 채 자신의 존재의미를 확인하고 끝없이 새로운 대상을 지향하는 모든 인간의 실존적 부조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시가 얼마 전까지 여러 대학 교양 국어 교과서에 거의 빠짐없이 실린 것도 그렇게 보편적 감동을 줄 수 있는 시심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대전광역시 한가운데 자리잡은 시민회관의 앞마당에 세워진 한 시인의 시비에 새겨져 행인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첫 부인과 사별의 아픔을 겪은 후에 한 시인은 1952년에 두 번째 아내 강 씨와 재혼을 하였다. 그리고 1953년 『문예』지에 시「병후(病後」로 2회 추천(모윤숙)을 받았는데 그 잡지가 정간되자 『현대문학』4월호를 통하여 3회 추천(박두진)을 받았다. 1955년 추천작인 시「병후(病後」역시 고통스럽게 투병을 마친 후 안정을 찾아가는 내면의 상태를 엿보게 한다. 얼마나 깊은 마음의 병을 앓았는지 "앓는 몸이 차츰차츰 회복해 가는 것처럼 신기한 일은 없다"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회복이 되자 "산이며 들이며 먼 마을들이 그 본래의 체력과 명암의 자리로 훤히 다가오"는 밝은 일정을 보내면서 시심을 닦아 가고 있었다. 어쩌면 한성기 시인에게 시는 스스로 앓는 내면의 병을 치유하는 방식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즉 시인에게 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인간의 실존적 운명에 맞서서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고통의 결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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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표현』2016-10월호 <한국 시단의 별들>에서
* 김석환/ 1981년 《충청일보》신춘문예로 등단, 1986년『시문학』천료, 시집『돌의 연가』외.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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