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단편
이병률
어느 긴 밤
가장 좋아하는 편지지를 앞에 놓고 앉았던
그때는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좋은 시절은 오래된 시간을 부를 수도
사용할 수도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누구도 편지를 부치지 않는 시간 동안
건물은 헐리고 꽃밭이 줄고
습관은 습관이 되고
아무도 읽어주지 않거나
어딘가에서 분실되고 말지도 모를 편지를 쓰는
그 새벽에 새들이 울면
두 눈 가득 침이 고이던 시절
감히 만나자는 말을 적어 넣고 풀칠을 했습니다
많이 미워한다는 말을 읽고 말을 잃었습니다
편지지라는 말이 사라져버린 세계의 빈 봉투처럼
돌아볼 단편의 증거가 없다는 것은
접지 않았으니
펼쳐야 할 것도
봉하지 않았으니 열어야 할 세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
*『포엠포엠』 2016-가을호 <신작시>에서
* 이병률/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1995년 《한국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바람의 사생활』『눈사람 여관』외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유성길/ 한창옥 (0) | 2016.09.22 |
|---|---|
| 시의 방울/ 손택수 (0) | 2016.09.21 |
| 문을 두드리는 무일유이의 포크너/ 이날 (0) | 2016.09.20 |
| 고추를 심으며 외 1편/ 최정 (0) | 2016.09.20 |
| 청동 여자/ 나금숙 (0) | 2016.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