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고추를 심으며 외 1편/ 최정

검지 정숙자 2016. 9. 20. 00:11

 

 

    고추를 심으며 외 1편

 

     최 정

 

 

  고추 심는 주말이면 심부름하는 척하다가 가방 싸들고 텅 빈 학

교로 도망치곤 했지. 흙투성이 낡은 작업복처럼 살지 않겠다고 영어

단어 줄줄 외었지.

 

  자루가 미어지도록 고추를 머리에 인 엄마를 따라 나선 것은 소풍

때 입을 옷 한 벌이 필요해서였어.

  장사꾼과 흥정하는 엄마를 멀찌감치 쳐다보던 사춘기의 나는, 엄

마가 창피했었던가. 고추 값이 떨어져 속상했었던가.

 

  이젠 중년의 내가 고추 농사를 짓는다.

  고추를 심고 흙을 덮어주면서 학교로 도망치던 내가 덮여졌으면,

엄마를 쳐다만 보던 내가 덮여졌으면.

 

  허리가 뻐근해지도록 내가 덮여지지 않아. 새옷 입고 브이 자 그

리며 신나게 웃던 소풍날 사진이 지워지지 않아.

 

  무섭도록 푸르러지는 봄날 한가운데, 흙투성이 일 장갑처럼 널브

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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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이 사슬

 

 

  나는 독해졌다.

 

  감자밭에 똬리 튼 독사 한 마리

  쇠스랑으로 죽여 버렸다.

 

  뱀만 보면 뒷걸음질 치던 내가

  난생처음 뱀을 죽였다.

 

  알 굵어지라고 웅덩이 물 끌어다

  긴 가뭄에 지켜낸 감자

 

  여기서 물러설 순 없다.

 

  내장이 터지고 머리가 납작해지도록

  내리치고 또 내리치다가

  등에 소름이 돋는다.

 

  축 늘어진 독사의 주검이 되어 슬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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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토피아』2016-가을호 <신작시>에서

  * 최 정/ 2008년 시집『내 피는 불순하다』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산골연가』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