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청동 여자/ 나금숙

검지 정숙자 2016. 9. 19. 23:54

 

 

    청동 여자

 

    나금숙

 

 

  그 도시에 가면 표지석이 있다

  수국꽃 아래에서 여자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서고에서 갓 나온 듯 묵은 종이 냄새가 나는 여자였다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가 잃어버린 언어 몇 개를 찾아다니는 중

이라고 했다

  넣어둔지가 언제였는지 모른다고 했다

  어디서 샀는지도 모르지만 잃어버린 것만은 확실하다고 했다

  향기가 우물처럼 고여있는 꽃나무 아래

  등받이 없는 의자를 가리키며 앉았다 가라고 했다

  그녀는 내 트렁크 속에

  자신이 잃어버린 언어가 있는지 아주 궁금해 했다

  미래에 올 언어 같다고도 했다

  소각장 가는 길을 내게 묻기도  했다

  누가 다 끌어 모아다가 태워버린 것 같다고,

  재가 되었어도 뒤져봐야 한다고 했다

  그 도시는 길이 온통 울퉁불퉁해서 낮과 밤, 월요일과 화요일,

  일상적인 시간들이 오다가다 자주 넘어지곤 한다고,

  동전이 주머니에서 튀어나갈 때, 그 언어들도 튀어나갔나 보다고 했다

  여자는 실은 죽어가고 있었고

  잃어버린 그 언어들이 자기를 회생시키는 묘약이라고 믿는 눈치였다

  내가 다시 길을 물으려는데 바람에 주소를 쓴 종이가 날아가 버렸다

  나야말로 이 말씀 몇 개를 찾지 않으면

  오십 년 만에 도착한 이 도시에서

  오늘 밤 당장 어디 묵어야 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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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토피아』2016-가을호 <신작시>에서

  * 나금숙/ 200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레일라 바래다주기』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