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파트의 글

필화로 희생된 조선의 문인들/ 하강진

검지 정숙자 2016. 7. 2. 23:27

 

<고전 한마당>

 

 

     필화로 희생된 조선의 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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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강진 / 동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Ⅰ.  필화의 의미 

  "시는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는 말이 있다. 이사 빌미가 되어 죄를 받는 것을 '시화(詩禍)'나 시안(詩案)'이라 부르고, 넓게는 글로 화를 입는다는 뜻에서 '필화(筆禍)'로 부르기도 한다. 예나 지금이나 필화는 당대의 지배 이념을 어기거나 최고 통치권자를 신랄하게 비판할 때 발생한다. 요즘은 범법 요소의 적발과 그 처벌 수위는 실정법 테두리 안에서 결정되지만 중세에는 왕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자의적으로 과도하게 집행한 것이 문제였다. 

  조선시대에는 필화 사건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주로 공신들이 집권한 훈신정치기, 당쟁이 치열하던 시기에 발생했다. 공통적으로 비정상적인 왕위 승계나 특정 집단의 권력 독점화 등 통치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필화에 연루된 당사자가 스스로 창작 의도를 밝힌 경우는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권력자는 시문을 고의로 왜곡하거나 문자를 악랄하게 날조해 정적(政敵)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었다.

  필화로 희생된 인물의 비중이 높을수록 그만큼 사회적 파장은 컸다. 정치 지형의 작위적 변화나 문단의 손실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실로 아쉬운 일이었다.

 

 

 Ⅱ. 훈구파의 내부 충돌과 남이

 

  백두산 돌은 칼 갈아 다 닳게 하고(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 물은 말에게 먹여 없애리라(豆滿江波飮馬無)

  남아가 나이 스물에 나라 태평 못하면(男兒二十未平國)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리오.(後世誰稱大丈夫)

 

  흔히 「북정가(北征歌)」로 알려진 남이(南怡, 1441~1468)의 시다. 그는 남휘의 손자로 태종의 외종손이고 권람의 사위로 17세 때 무과에 장원했다. 1467년 5월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해 적개공신에 책봉되었고, 10월에는 압록강 북쪽의 여진족을 정벌할 때 우상대장으로서 거둔 출중한 군공으로 공조판서에 파격적으로 발탁되었다. 이듬해 9월에는 병조판서로 기용되었으니 겨우 28세 때의 일이었다

  젊은 패기의 남이는 임금 곁에서 정치를 쥐락펴락하는 공훈 대신들과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웠다. 그러나 병조판서에 제수된 지 13일 만에 든든한 후원자 세조가 승하함으로서 그의 운명은 달라졌다. 예종은 보위에 오르자마자 형조판서 강희맹과 중추부지사 한계희 등의 요구에 따라 남이를 이내 겸사복장으로 좌천시켰다. 그는 한 달 뒤 대궐에서 당직하다가 혜성을 보고 "이는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배치하는 형상이다."라는 말을 동료에게 건넸다. 병조참지 류자광(1439~1512) 역시 이날 수직하다가 그 말을 엿듣고는 모반 혐의를 덧씌워 밀고했다. 남이가 말한 '묵은 것'은 현재의 왕 예종이고, '새로운 것'은 미래의 왕을 암시하므로 왕조 교체의 역심을 품은 것이라며 제멋대로 왜곡했다.

  이를 기화로 옥사가 신속하게 처리되어 남이는 처형되고, 주도자들은 익대공신의 훈장을 달았다. 그들은 왕실과의 혼사로 동아줄을 잡았고, 상호 통혼(通婚)과 훈신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결속을 다지거나 경쟁하면서 자파의 세력을 키워 나갔다. 특히 한명회(1415~1487)는 예종의 첫째 장인이고, 그의 일가 한백륜은 예종의 둘째 장인이었다. 이들은 남이의 정치적 비중이 확대되는 것을 좌시하지 않았다.

  반면에 남이는 개국공신 남재(1351~1419)의 후손임에도 여타 훈신들과는 대비되었다. 태종의 4녀 정선공주가 조모였지만 그가 태어나기 전에 21세 나이로 죽고 없었고, 부친은 존재가 미미했다. 또한 자신은 권근의 손자이자 세조의 최측근 권람(1416~1465)의 넷째 사위였지만, 옥사 훨씬 전에 부인이 요절한 상태라 가문의 후광을 바랄 수 없는 신세였다.

  남이의 시는 공초 당시에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의 사후 약 140여 년쯤 『지봉유설』과『학산초담』에 작품이 처음 소개되었기 때문에 옥사와의 연관성을 따지기란 쉽지 않다. 다만 정범조(1723~1801)와 허전(1797~1886)은 류자광이 백두산 정상에서 지은 남이의 시를 가져와 '平賊'을 '得國'으로 변개한 뒤 형장의 제물로 삼았다고 했다. 여하튼 남이의 필화는 권력욕으로 단단히 엮인 훈구세력이 권력을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었다고 하겠다. 이들은 무오사화에도  깊숙이 개입한다.

 

 

  Ⅲ. 무오사화와 김종직

 「조의제문(弔意制門)」은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부친 상중이던 1457년 10월에 지은 글로  조선조 최초 사화의 단초가 되었다. 제자 김일손(1464~1498)이 성종 말기인 1490년 승정원 주서로 있으면서 스승의 글을 사초에 삽입했다. 8년 뒤 남이 옥사의 핵심이었던 류자광이 김종직의 문집에 실린 「화도연명술주(和陶淵明述酒)」시를 아울러 가져와 세조를 헐뜯은 것이라며 연산군에게 보고함으로써 정국이 발칵 뒤집혔다.

  연산군은 김종직이 왕을 조롱한 대역죄를 지었으므로 대신들에게 양형을 의논하도록 전교했다. 단죄의 근거로 정치적 맥락과 동일시되는 「조의제문」의 함의를 지적했다. 곧 진시황을 뜻하는 '조룡(祖龍)은 '세조'에, 초나라 희왕의 손자 의제(義帝)'를 지칭하는 어린 '희왕'은 '단종'에 각각 비의한 것이라 했다. 그리고 희왕이 항우에게 시해된 것은 세조에게 반격을 당해 죽은 단종을 가탁한 것으로 풀이했다. 그리고 김종직이 주자(朱子)의 필법을 자처하며 찬한 글에 대해 김일손이 "이로써 충분(忠憤)을 부쳤다."라 찬미한 사평을 불손하게 사초에 함께 기재한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연산군의 하명을 받은 신하들은 선왕을 부정한 김종직을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다. 사실상 강요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양형 논의였다.

  한편 김종직이 1459년 문과에 급제해 중앙 정계에서 활약함으로써 제자들이 관직에 진출한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1476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자 성종은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사류를 대거 기용했다. 훈구와 사림의 대립은 연산군 때 극단으로 치달았다. 이극돈이 『성종실록』을 편찬하러 기사를 정리하다가 발견한 「조의제문」을 빌미로 무오사화를 일으킨 것이다. 이리하여 6년 전에 죽은 김종직은 부관참시되고, 제자들은 능지처참되거나 험한 유배지로 내몰렸다.

  「조의제문」은 도학의리를 바탕으로 왕조의 정통성을 강조한 27세 젊은 학자의 보편적 역사의식을 담은 글이다. 항우는 세조이며, 의제는 단종임을 명시적으로 표현한 구절은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단종이 세상을 하직한 그 달에 지었고, 우의적 의미로 해석할 때 항우는 세조로 치환될 개연성이 다분했다. 하지만 부친이 1455년 12월 원종공신에 책훈된 사실이 있듯이, 그의 가문을 반(反) 세조적 성향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 만일 단종의 사사에 대한 비판과 분노의 정서를 표출한 것이라면 세조 초기에 출사해 쌓은 관리로서의 경력은 성격이 보호해진다. 이런 까닭에 허균(1569~1618)과 윤중(1629~1714)은 김종직을 불충한 마음을 품은 자로 기술한 바 있다. 그렇다면 '충분'의 의리는 세조보다 임금 주변의 난신적자들, 곧 훈구세력을 겨냥한 의미로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주자의 필법 존중은 대의명분을 중시한 김종직의 학문적 지향점이 아니던가.

  「조의제문」은 기득권 집단에게 걸림돌이 되는 신진사류를 일거에 제압하는 호재가 되었다. 이 필화로 비판과 견제가 사라진 조정에는 훈구파와 연산군의 절대 권력만 남았고, 6년 뒤 비화된 갑자사화로 사림파는 극도로 위축되었다.

 

 

  Ⅳ. 기묘사화와 조광조

  정암 조광조(조광조, 1482~1519)는 김종직의 재전 제자다. 고조부 조온(1347~1417)은 이성계의 생질로 개국 정사 좌명의 공신 대열에 모두 합류해 선초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조부 조충손이 의형제 안평대군의 역모에 연좌되면서 가문이 침체되었다. 줄을 잘못 선 탓에 선대의 화려한 경력은 부친의 현달로 이어지지 못했다.

  1506년 연산군 폭정에 반발한 훈구파인 중종의 외척 박원종, 김종직 제자 류순정과 성희안 등이 반정에 성공했다.중종은 느닷없이 보위에 오른 탓에 대신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는데, 1510년 이후로 이들이 차례로 죽자 정국 전환의 계기가 찾아왔다. 이때 별시문과에 급제한 조광조는 임금의 지원 아래 도학정치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현량과를 설치해 두 차례 사화로 와해될 지경의 사림 세력을 재건하는 한편 훈신들의 요직 기용을 저지했다. 나아가 정국공신 중 가짜 수훈자 76명을 공신록에서 삭제했다. 이때가 1519년 11월 11일이었다.

  대사헌 조왕조의 대공세로 위기를 느낀 훈구파는 음모를 꾸며 사림파에 역공을 취했다. 동갑내기 예조판서 남곤(1471~1527), 도총관 심정(1471~1531)은 중종의 장인으로서 외손자의 세자 욕심이 있던 홍경주를 앞세워 희빈홍씨 경빈박씨와 공모해 날조한 '주초위왕(走肖爲王)' 문자를 왕에게 고발한 것이다. 위훈 삭제 결정이 나고 불과 나흘 뒤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렇게 되자 중종은 제대로 추국도 하지 않은 채 서둘러 중형을 결정했다. 이것이 조선조 세 번째 학살인 기묘사화다.

  조광조는 11월 18일 전라도 화순의 유배지로 떠났다. 그리고 한 달 만에 의금부 도사가 사약을 갖고 화순에 도착했다. 그는 어명의 진위를 확인한 뒤 숨가쁘게 달려왔던 지난 4년 동안을 소회하며 절명시 5언절구를 지었다.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했고/ 나라를 집안같이 걱정했노라/ 밝은 해가 세상 내려다보며/ 내 충정을 밝게 비추리라"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고 두껍게 하지 말라. 먼길을 가기 어렵다."는 유언을 남긴채 담담하게 독주를 마시고 38세의 나이로  죽었다.

  대동의 도학사상을 불꽃처럼 피워 보려던 조광조의 개혁의지는 이렇게 실체 없는 필화로 무참히 꺾여 버리고 말았다.

 

 

  Ⅴ. 소북파의 축출과 권필 

 

  궁궐 버들 파릇파릇 꽃은 어지러이 날고(宮柳靑靑花亂飛)

  온 성 안의 벼슬아치들 봄빛에 아첨하네(滿城冠蓋眉春輝)

  조정에서 바야흐로 태평세월 축하하는데(朝家共賀昇平樂)

  누가 곧은 말을 선비에게서 나오게 했나(誰遣危言出布衣)

 

  석주 권필(權韠, 1569~1612)의 이 시는 원제가 「문임무속삭과(聞任茂叔削科)」이고 흔히「궁류시」로 통한다. 시어 '위언(危言)'은 1611년 3월 문과별시에서 무숙 임숙영(1576~1623)이 폭압적인 정치를 비판하며 쓴 대책문을 지칭한다.  이 글에서 광해군 외척의 인사 농단과 언로 탄압의 횡포를 거침없이 고발했다. 임금은 과거 답안지를 친람하고 격노한 나머지 합격자 방목에서 임숙영을 삭제하도록 명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권필이 조정을 풍자해 위의 시를 지었다.

  권필의 필화는 다소 의외의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1612년 2월 광해군이 김직재가 반역을 꾀했다는 봉산군수의 보고를 받고 압송해 국문하자, 그는 황해에 유배 중이던 황혁(1569~1612)과 모의해 임금의 이복 조카 진릉군을 추대하려 했다고 허위 자백했다. 이이첨이 9월까지 주도한 이 무고한 옥사로 영창대군(1606~1614)을 한때 지지한 소북파 100여 명이  무자비하게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당시 연루자를 색출하기 위해 진릉군의 양외조부 황혁의 가택을 뒤지던 중 어떤 책 겉장에 끼워져 있던 권필의 시를 우연히 발견했다. 조작의 혐의가 농후하지만 결국 권필은 역모자 황혁과 같은 무리로 엮일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의 처남 류희분 · 류희발 형제는 즉시 내용을 문제삼고 곧바로 왕에게 울분을 호소했다. 이로써 권필은 끔찍한 무옥(誣獄)을 비켜갈 수 없었다.

  권필은 3월말 체포되었다. 이 시를 진작부터 인지하고 있던 광해군은 친국을 열어 '궁류(宮柳)'가 외척을 모독한 것이라며 대역죄를 추궁했다. 관점 여하에 따라 시 속의 '柳'자가 바로 류씨를 지칭한 것이라는 고의적 독법도 가능했다. 하지만 권필은 임숙영처럼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는 조정을 넌지시 풍간하고 봄날의 좋은 경치를 읊기 위해 중국 왕원지의 시를 인용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역린을 건드리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그의 주장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고문 현장에 있던 우의정 이항복(1556~1618)은 " 이 시가 무심하게 지은 것은 아니지만 어찌 중형에 처할 정도입니까?" 하고 간청했다. 좌의정 이덕형(1561~1613)도 국가에서 시안(詩案) 때문에 선비를 죽이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권필의 재판은 신속하게 진행되어 4월 1일 형벌이 확정되었고, 7일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가기 위해 도성을 나서다 장독의 여파로 죽고 말았다.

  권필의 필화는 광해군의 지지 세력인 대북파가 소북파를 몰아내고 독점적 정권을 구축하려는 차원에서 벌어진 비극적 사건이었다.

 

 

  Ⅵ. 서인 정권의 안착과 정문부

  농포 정문부(鄭文孚, 1565~1624)는 근래 북관대첩비로 관심을 끈 인물이다. 임진왜란 때 함경북도 병마평사로서 의병을 이끌고 왜군을 연파했지만 억울하게도 선무공신 녹훈에서 배제되었다. 주로 외직에 머물다 1613년 '칠서의 옥'을 계기로 대북(大北) 정권의 광풍이 몰아치자 길주목사를 그만두고 은거했다. 이후 영창대군이 살해되고 인목대비마저 1618년 1월 폐출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해 9월 그는 창원부사에 임명되었고, 공무 여가에 10수의 「영사(詠史)」시를 지었다. 그리고 2년간의 임무를 마치고 귀향한 뒤로 수년 간 두문불출했다.

  1623년 3월에 서인이 무력을 동원해 인조반정을 단행했다. 그는 원수에 물망이 올랐으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양하고 전주부윤으로 나갔다. 이때 전임자였던 반정공신 박정(朴炡, 박세당의 부친)의 청탁을 거절해 둘 사이가 크게 나빠진 일이 있었고, 다음해 1월 평안병사 이괄(1587~1624)이 난을 일으키자 부총관에 임명되었으나 모친상 중이었던 그는 병으로 운신할 수 없어 부응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10월 박내장(朴來章)의 역모에 휘말렸으니 대장으로 추대되었다는 죄안이었다. 사건 전모를 심문한 결과 결백이 밝혀져 석방될 무렵, 뜻밖에도 6년 전 창원부사 시절 지은 시가 자신의 목을 겨누는 칼이 되어 돌아왔다. 권력에 집착한 박정과 최내길(최명길의 형) 등은 연작시 중 「초회왕(楚懷王)」에서 꾸투리를 잡아 인조를 비방했다는 죄목을 붙였다.

 

  초나라 세 집만으로 진 또한 멸하리라(楚雖三戶亦秦亡)

  예언한 남공 말을 꼭 들어맞지 않았네(未必南公說得當)

  한 번 무관에 들어가 백성 희망 끊겼나니(一入武關民望絶)

  나약한 손자는 어이해 또 회왕이 되었나(孱孫何事又懷王)

 

  초나라 회왕은 장의(張儀)의 계략에 속아 진나라를 공격하다가 무관에서 죽었다. 초 멸망 후 왕으로 옹립된 그의 손자도 회왕이라 칭했으니 바로 항우에게 피살된 의제를 말한다. 정문부가 선조의 우둔함과 손자 인조의 나약함을 두 회왕에 빗대어 희롱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단종을 회왕에 비유한 것이라며 일으킨 「조의제문」필화를 상기하면 곡해의 실상이 금방 드러난다. 더구나 이 시는 광해군 치세 때 창작되었으므로 반역과 연계한 그들의 발상은 아예 어긋난다. 당시 추국 관원이던 이식(1584~1647)과 조익(1579~1655)은 정문부가 시를 우연히 지은 것이며 깊은 뜻이 없으니 죄가 될 수 없다고 극력 호소했다. 하지만 정문부는 1624년 11월 19일 가혹한 고문을 받다가 옥중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편 1665년 우의정 허적(1610~1680)은 정문부의 시가 국가와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국문을 받다 죽었으니 원통하다고 했고, 현종은 시어에 중대한 뜻이 없음을 재차 확인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홍문관 수찬 이단하(1625~1689, 이식의 아들)는 농포 시를 반복해서 읽어봐도 의심스러운 점을 찾을 수 없고 그의 죽음을 나라 사람들이 슬퍼한다고 했다. 특히 이때 정문부가 우찬성에 추증된 사실로 볼 때 박정 일파가 밀어붙인 시 해석이 얼마나 억지였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정문부의 무고한 옥사는 대북파를 쫓아낸 서인(西人)이 권력을 확고하게 장악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참화였다. 이 필화로 임진왜란 때 구국의 선봉장이었던 정문부를 애석하게 잃고 말았다.

 

 

  Ⅶ. 마무리하며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만 역사 읽기는 패배자의 억울한 희생을 기억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필화는 권력자가 사회를 통제하고 민심 이반을 선제적으로 차단하고자 기획한 사건이었다. 폭력적인 억압 행위로 희생된 인물의 삶에 공감하거나 사건의 본질을 재조명하는 일은 역사적 진실을 탐색하는 한 과정이다. 정치 격변기에 발생한 필화는 한국 정치사나 문화사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필화는 근세 이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필화는 정보를 차단하고 문화를 통제하는 속성이 있다. 자기 검열로 위축된 작가의 붓은 다원적 · 민주적 문화 형성과 정치 발전을 후퇴시킨다. 대중 정서와 동떨어진 인터넷 댓글 통제는 현대판 필화의 또다른 모습일 수 있다. 민주사회일수록 열린 소통 구조가 소중하다. 이것이 조선시대 필화에서 얻을 수 있는 본질적 가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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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月刊文學』2016-7월호고전 한마당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