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식성, 시
정숙자
그마저 새빨간 살을 먹어야 하다니,
꼬리 긴 신음 쬐어야만 꽃 피울 수 있다니,
그렇다면 내 어찌 마지막 한 줄기의 절규인들
쾌히 감수하지 않을 수 있으랴.
어떤 이가 걸어간 마지막 길은
어떤 이가 끌고 갈 첫길이
되기도 한다
모든 죽음은 표절이다
전쟁, 자살, 그보다 별난 외인사, …라 할지라도
죽음은 죽은 자의 것도 남은 자의 것도 아닌
저 너머 존재자의 미문美文이므로
회색이든 검정이든 다른 뭣이든
생존 또한 표절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인생에서 배운 건 인생이지만
다 배우지 못한 것
또한 인생이다
동경과 침묵 속에서 마디마디
자라나는 그마저 육식성이(었)다, 는
베일veil 앞에서
나는 흰 목과 푸른 목을 준비한다
떠나온 곳으로 이어지는
출생과 삶과 최후를
표절부의 고리에 정중히 비끄러맨다
-『시와표현』2016-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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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에서/ 2017.6.26.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뿌리 깊은 달』『열매보다 강한 잎』등, 산문집『행복음자리표』『밝은음자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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