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맘몬*과 달과 비/ 이재훈

검지 정숙자 2015. 11. 3. 14:01

 

 

    맘몬*과 달과 비

 

    이재훈

 

 

  신성한 언어들이 타락하기에 한 달이면 족하지. 떠날 채비는 한 시간

이면 족하지. 저속하고 미천한 기차를 탔지. 오징어 다리를 씹으며 깡통

맥주를 홀짝거리며 옆자리 아가씨를 흘깃거리는 감성의 오후.

 

  인간들의 감격은 얼마나 단순할까. 차창 밖으로 펼쳐진 햇살과 나무만

으로도 잠작할 수 있지. 자연의 품이 안락한가. 너와의 언약으로 고통이

하나씩 늘고, 빚이 늘고, 미래의 노동이 늘었지. 어느새 해거름, 차창에

서 졸고 있는 저 빈곤한 육체.

 

  예술가들이 그토록 애증하는 구름의 우상. 꽃들의 우상. 존재의 우상.

기차가 지나가는 순간에 모두 깨달을 우상들. 그것을 고귀하게 껴안고

천박한 언어들을 이리저리 날리지. 밥그릇이 반짝거릴 때까지 손으로 비

비고, 눈으로 빚어내는 이 세계의 공방.

 

  기차를 타지. 오래도록 타면 어둠이 내리고 달이 내리지. 늘 기억나는

순간들은 눈물을 훔칠 때가 아니지. 억울할 때나 비참할 때지. 세상의 비

감을 온몸으로 받을 때지. 달을 보면 온 세계가 멈춰 있어.

 

  거머리가 종아리를 빨아먹어도 참을 수 있지. 그런 낮, 그런 밤들도 모

두 견딜 수 있지. 달이 지고 비가 내려도 이 땅의 우상들은 불을 반짝거

리지. 밤하늘 가득한 네온 십자가. 모두 고개를 숙이고 흠뻑 젖지. 비가

내려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저 우상. 밤새 반짝, 반짝거리지. 별보다 더

욱더.

               

 *Mammon, 물질적인 부와 탐욕의 천사.

 

 - 『문학동네』2015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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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질적인 부와 탐욕 앞에서 초연해지기란 힘든 일이다. "신성한 언어들이 타락하기엔 한 달이면 족"하지만 이러한 삶에서 떠날 결심은 "한 시간이면 족"하다. 힘든 유혹이지만 떠날 준비만 한다면 떠날 수 있다. 그러나 "떠날 채비"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 우리가 애증하는 우상들은 힘이 세다는 것. 아무리 "달이 지고 비가 내려도" 이 세계의 우상들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을 반짝거리며 밤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다. 밤새 반짝, 반짝 빛나고 있다. (권경아)

 

*『시현실』2015-가을호 <지난 계절의 좋은 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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