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풀 되리라/ 이생진

검지 정숙자 2015. 11. 3. 20:30

 

 

   풀 되리라

 

   이생진(1929~)

 

 

  풀 되리라

  어머니 구천에 빌어

  나 용 되어도

  나 다시 구천에 빌어

  풀 되리라

 

  흙 가까이 살다

  죽음을 만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풀 되리라

 

  물 가까이 살다

  물을 만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풀 되리라

 

  아버지 날 공부시켜

  편한 사람 되어도

  나 다시 공부해서

  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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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생진 ' 풀 되리라'

  뭇 생명의 경이에 대한 성찰

 

  이호신

 

십수 년 전 인사동 시낭독회에서 이생진 시인의 <풀 되리라>를 접하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나는 그날 이 시를 화첩에 옮겨 적은 후 생사(生死)의 노래와 의지의 신념을 떠올렸다. 그리고 대자연에 대한 경외를 생각했다.

"어머니 구천에 빌어/ 나 용 되어도/ 나 다시 구천에 빌어/ 풀 되리라" "아버지 날 공부시켜/ 편한 사람 되어도/ 나 다시 공부해서/ 풀 되리라"

이처럼 "용 되어도" "편한 사람 되어도" 다시 풀이 되겠다는 시의 행간이 보여준 지극한 하심(下心). 그 시심의 경지는 사뭇 심장한 결의와 현실의 초월을 보여 주었다. 그 후 이 시는 5년 전 지리산 자락(산청)으로 화실을 짓고 귀촌한 후 더욱 내 귓전을 맴돌았다. 아니 그 시심의 영혼이 나를 자극했다. 가족을 두고 홀로 내려와 텃밭을 일구며 붓을 든 나날이 지속되면서 이 시의 의미가 더 새로워졌다. 사계절의 운행과 뭇 생명에 대한 경이와 질서를 살피게 되면서.

 

하나의 씨앗이 해와 달, 비와 바람의 기운을 받아 토양에서 생성, 발아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우주의 섭리였다. 고백하건대 귀촌 이전에는 꽃과 나무를 심지도 가꾸어보지도 않은 채 사생하며 밑그림을 구해 왔었다. 이처럼 작가로서 진정성이 박약했음을 성찰하게 된 것이다. 해서 소박한 풀꽃과 잡초마저도 유심히 살피는 변화의 시간을 갖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이 <풀이 되리라>의 사상이 떠올라 한지를 펼치고 붓을 들었다. 근자에 즐기고 있는 소위 '한글 뜻 그림' 소재로 '풀' 자를 이미지화한 것이다. 즉 '풀' 자의 끝 획에 수직으로 풀뿌리와 잎을 그려 형상화하였다. 나아가 모든 생명의 근원지인 땅을 배경으로 수많은 씨앗을 흩뿌려 풀의 생성을 은유했다. 그다음 바탕 화면 아래와 위에 시 일부를 써넣어 '뜻 그림'이 되기를 꾀하였다.

졸작을 펼칠 때마다 생각이 떠오른다. 지금껏 화가로 세상을 살아오면서 한갓 누추한 명예에 잠시 목말라했던 지난날이 부끄러워지는 시간, 나는 잠시 풀이 되고 싶다. 어떤 세간의 유혹과 평안을 물리고 오롯이 나의 붓길을 가고 싶은 것이다. 별빛을 우러르는 대지의 이름 모를 풀처럼!

 

  ※ 그림 제목/ '풀' 이호신, 30×45.5㎝.2010

  ※ 그림을 옮길 재주가 없어 여기 소개하지 못함을 양해 바랍니다.(정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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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심』2015-11월호 <11월 기획/ 화가에게 영감을 준 한 편의 시>에서

 * 이호신/ 동국대 교육대학원 수료. 개인전 16회. 저서 『화가의 시골편지』『지리산 진경』『가람진경』『우리마을 그림순례』『숲을 그리는 마음』『길에서 쓴 그림일기』등이 있음. 국립현대미술관, 영국대영박물관, 이화여대박물관, 경기도미술관 등에 작품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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