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크레바스(crevasse)/ 박수중

검지 정숙자 2015. 10. 30. 14:19

 

 

    크레바스(crevasse)

 

    박수중

 

 

  수만 년 쌓인 빙하의 틈이

  눈(雪)에 반사하는 빛의 무게만큼 조금씩 부서졌다

 

  레이니에 산* 정상 부근의 능선에서

  처음 눈길의 균열에 부닥쳤을 때

  내심 저 정도는 건너뛰어야지 하면서도

  결국 2미터의 긴장을 넘어서지 못했다

 

  뛰어오르면 그대로 공중에서 정지할 것 같은

  그 가늠할 수 없는 추락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수만 년의 얼음이 단층을 이룬

  아득한 적막의 나락에는

  부패되지 않은  그 옛날의 세월들이

  따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큰 소리로 부르면 암흑의 저편에서

  수만 년 동안 잠들었던 목소리가 깨어나 반향하고

  잊혀진 공룡의 화석처럼, 누군가

  녹혀 줄 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 순간 이상

  칼날 위에 선 고독을 마주한 적 없었으니

  살아간다는 건 무의식의 틈을 건너는

  우연의 연속이라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레이니에 산(Mt Rainer): 미국 워싱턴주 소재 국립공원(439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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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문학』2015-11월호 <시>에서

  * 박수중/ 2010년 『미네르바』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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